임재와 영광을 위하여 (요 12:1-8)
헌신으로 드려지는 예배와 여유로 드려지는 예배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이고도 유명한 성경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마리아의 행위와 그 심령에 대해 묵상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룟 유다를 비롯해 마리아를 비난했던 자들의 태도와 그 중심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또 다른 주인공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리아와 그녀를 꾸짖는 제자들이 일으키는 소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열리고 내가 원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형편이 나아지면, 순종하겠습니다. 제게 힘이 생기면, 길이 열리면,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인력과 재정을 동원할 힘이 생겼을 때 주님이 원하시던 예배를 드릴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여유로 드리는 예배에는 진정한 헌신이 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국 교회의 예배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예배당이 건축되기 위해, 많은 성도들이 옥합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여유가 생겨서 나누고 바치는 드림이 아닌, 사랑과 희생과 갈망으로 심는 헌신이었습니다. 코로나를 통과해가며,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소파에 앉아 티비와 스마트 폰으로 예배를 그저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있는 한편, 원하지 않는 예배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항상 있는 것과 항상 있을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오늘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길 축복합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선택해서 드릴 수 있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영광과 임재
겨울을 경험해본 적 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원주민에게 ‘눈’이란 말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익숙한 단어, ‘영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영광이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영광과 임재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영광에 대해 말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산 전체에 임하기도 했고, 역대하 7장에서는 여호와 성전에 임한 영광으로 인해 제사장들조차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고 취한 듯 그 영광을 사모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하나님의 모습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죄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손으로 덮으셨습니다. 그 영광이 모세에게 잠시 묻어간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했고,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오늘은 신실한 듯 하지만 내일은 죄에 넘어질 수 있는 간사한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면할 때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임재는 이 땅에서 영광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직면할 수 없는 우리가 당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임재 안에서 만나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함을 알았듯이, 임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깨닫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이라면, 그 공간을 가득 채운 황홀한 향기가 바로 임재입니다. 영광은 하나님 그 분 자체이시고, 임재는 육신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영광을 알 수 있게 하는 하나님과의 만남, 체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광을 누리도록 택하셨습니다. 신앙의 궁극은 영광 안에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영광을 아는 자들, 임재를 경험한 자들은 삶이 변화되기 시작됩니다. 나그네와 같이 머무는 이 땅에 매이지 않고 영광에 이르는 부활의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이 영원한 소망이 우리 삶을 움직이는 갈망이 됩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옥합을 깨뜨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이 땅 곳곳으로 향유의 향기가 퍼져나가게 합시다. 본향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영광을 구하며 세상을 이기는 신실한 신앙이 우리가 깨뜨려 드린 예배의 향기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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