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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회복해야 할 계시(마21:12-16)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공생애의 3여 년이 지났을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향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의 때와 같이 성전의 상인들을 내어 쫓으시며 한번 더 하나님의 집이 기도 하는 집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성전의 상인들은 필요에 의한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포함해 먼 이국 땅에서부터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유대인들을 위해, 흠 없는 제물도 드려질 양이나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강도’로 비유하셨습니다.

상인들의 물건들을 엎으시며 그들의 행위를 크게 꾸짖으시고 온 이스라엘의 시선이 주님께 집중되었을 때,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을 선포하십니다.

기도의 집의 핵심 가치 –하나님과 만나는 처소

본 문 12 절 에서 사용된 ‘ 성전 ’은 ‘ 히에론 ’이란 히브리어 로 , 건물이라기보다 ‘임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상인들을 쫓으시며 성전에서 화를 내신 이 사건의 기록부터 성전을 ‘임재’의 장소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은 ‘오이코스’란 단어로 ‘집’을 기록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또한 ‘기도’로 번역된 단어는 ‘간구하다’, ‘빌다’란 의미보다 ‘장소’적 개념을 내포한 단어입니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집, 기도의 집은 ‘주님이 거하시고 머무시는 곳’, ‘주님이 우리를 만나는 곳’을 뜻합니다. 기도의 집 운동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는 ‘24 시간’보다 ‘주님이 거하시는 처소’의 개념입니다.

마치 가족이 함께 사는 집처럼, 주님께서 머무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는 ‘공간’으로서 기도의 집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성전을 ‘종교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보시며 ‘하나님이 거하시며 우리와 만나고 함께 하는 곳’으로 성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기도의 집의 핵심 가치 –다윗의 장막

기도의 집의 두 번째 핵심 가치는 ‘다윗의 장막’입니다. 성전은 모세의 성막과 다윗의 장막이 하나된 장소였습니다.

이 두 요소는 구약에서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다윗의 장막 이전에 모세오경의 신명기 말씀이 선과 악의 기준점 역할을 했다면, 다윗의 통치 이후 이스라엘 왕들은 ‘여로보암’의 뒤를 따른 악한 왕들과 ‘다윗’처럼 행한 선한 왕들로 나누어집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7대 영적 각성 운동의 중점도 ‘다윗의 때’와 같은 회복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한 이후 기준이자 돌아갈 지점처럼 기록된 ‘다윗의 장막’은 과연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다윗의 장막은 역대상 15장 1절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 다윗이 자신의 궁전 앞에 여호와의 법궤를 둘 곳을 구별하여 친장막이 바로 다윗의 장막입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33년 동안 멈추지 않는 예배와 기도가 드려졌고 이후로 모세의 성막과 함께 ‘성전’으로 흡수됩니다. 솔로몬의 강력한 왕권 아래 봉헌된 ‘성전’의 역사가 시작되며, 다윗의 장막은 잊혀져 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위대함은 웅장한 성전으로 기억됩니다.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선포된 것은 270-80년이 흐른 후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일어나, 다윗의 장막을 선포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아모스의 예언은 신약에 들어와 야고보 사도의 입으로 다시 한번 선포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믿는 이방인들이 많아지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방인의 부흥에 대해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들에게 율법적 제약을

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우려였습니다. 그때 야고보 사도가 일어나 선포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15:15-17).” 한 새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선포된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마지막 때 교회의 DNA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강력한 기도와 예배의 영성과

종국적 교회로서 한 새 사람 되어야 할 원형이 다윗의 장막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기도와 예배의 처소가 되라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과 그 중심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그의 왕궁 앞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를 갖다 놓고 멈추지 않는 예배와 기도의 소리가 온 이스라엘에 울리게 했던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코이노니아를 나누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다윗은 사랑으로 시작된 구속사와 이 땅으로 진격해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경륜과 섭리를, 목동이었던 한 청년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