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을 기경하라 (마 13:1~9)
열매 맺는 밭과 열매 맺지 못하는 밭
오늘,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복음은 각기 다른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복음을 자신과 상관없는 미신이나 편협한 종교로 취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고 소경이 눈 뜨게 하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누군가는 병을 고침받기 위해, 누군가는 단순한 흥미 때문에, 누군가는 주님을 흠 잡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동일한 시대에 선포되지만, 사람의 마음 밭에 따라 열매는 달리 맺어집니다. 진리를 붙잡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은 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생명이 역사할 수 있는 심령의 밭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 발육되고 열매맺는 마음의 밭으로 기경되어 있길 축복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 -첫째, 길 가(쓴 뿌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첫 번째 마음 밭은 ‘길 가’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말씀이 뿌려지더라도 새 들, 곧 마귀가 빼앗아 가 아예 뿌리를 내릴 새도 없는 마음 밭의 상태입니다. 쓴 뿌리를 가진 마음 밭이 이와 같습니다. 쓴 뿌리는 상처를 받은 후 생기는 부작용으로써, 말씀이 심령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며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종류와 모습이든,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아픔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상처받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과 대상을 용서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정죄와 같은 악한 대응으로만 반응한다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생겨난 쓴 뿌리는 내 안에 생명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마치 바이러스가 퍼지듯 주변 사람들을 더럽히기도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12:1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때론 억울하고 때론 서러운 고통들에 대해서 쓴 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반응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인 교회, 셀 처치 안에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밭을 병들게 하는 쓴 뿌리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최초의 근원적 상처들이 보통 0~7세, 가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이러한 근원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조건없는 용납과 기다림, 사랑을 통해 우리 안에 곪았던 상처들이 도려내지고 새 살이 돋기 시작합니다. 주님 안에서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경험한 자들은, 그 역시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로 서게 됩니다. 영적 부모와 형제 안에서, 서로 회복되는 역사가 날마다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 –둘째, 돌 밭(내적 맹세, 돌 같은 마음)
두 번째는 돌 밭입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어서 씨앗이 말라죽는 돌 밭은 ‘내적 맹세’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와 같습니다. 내적 맹세는 거절감이나 좌절감, 수치감 등으로 인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를 발동시키며 다짐하는 굳은 마음입니다. “나는 우리 엄마같이 살지는 않을거야.” “나는 절대 이런 대우를 받지 않을거야.” 이러한 심령의 상태는 중세 기사의 갑옷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내적 맹세를 반복하며 돌 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상처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관계합니다. 아픔에서 비롯된 내적 맹세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작은 실수라도 드러날 때면 방어 기제를 발동시켜 타인이나 상황을 탓하는 등 변명에 급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적 맹세가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타인의 말도 받아드리지 못하고, 고독함을 느낍니다. 동성애도 이런 내적 맹세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지치고 외롭게 만드는 돌 같은 마음들이 제하여 지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치유하도록 기도합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 –셋째, 가시떨기 위(자력 성취 기질)
세 번째로,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이 있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우리 안에 겨우 뿌리내린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시 떨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력 성취 기질’이 그렇습니다. 자력 성취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삶을 꾸리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이런 모습을 칭찬받기도 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런 삶의 태도를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에게 다른 의는 없습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자력 성취 기질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행위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스스로를 검증해야 칭찬받고 인정받는 상황 속에서 살아오면서, 자신의 감정마저 속이고 “나는 이 정도로 착한 사람이야.”, 혹은 “나는 이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최면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즉, 자력 성취 기질은 성실하고 착한 행동이 아닌, 마음의 태도로 결정됩니다. 바르고 부지런하며 선한 삶을 훈련해 왔기에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런 기질로 인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의지가 곧 하나님과 분리되는 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부인을 배울 수 있길 축복합니다. 보상적 사랑이 아니라,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2022년도, 우리의 심령을 병 들게 했던 쓴 뿌리들이 드러나고 깨끗이 잘려나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말씀의 생명이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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