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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의 회복(요 4:20-26)

다윗 왕의 시대적 사명-이가봇을 끝내는 것

다윗 왕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남유다의 왕으로 통치하였고,

사울 왕가를 하나님께서 정리해주시면서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3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사무엘하 6장의 ‘베레스 웃사’ 사건 이후, 다윗은 법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옵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왜 법궤를 찾아오는 일을 우선순위로 삼았을까요?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신정적 통치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삼상4:19-21).”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교집합 구간에서 일어난 일이 ‘이가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의 통치 20년간 모든 힘과 권위를 동원하여 자신의 사위인 다윗을 죽이는 일에 올-인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초대 왕의 점철을 밟지 않고, 다윗 왕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마음의 궤적을 좇으며 그의 모든

힘과 권위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 오는 일에 올-인하였습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했던지,

자신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체면이 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원했습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삼하6:22).“ (새번역: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사실, 자기 영광과 체면치레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러했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는 마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그들의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다. 우리 내면의 위선과 허례허식이 제거되고 다윗과 같이 이보다 더 낮아질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부어지길 축원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가 결코 법궤를 빼앗기지 않길 원합니다. 대한민국의 흥망성쇠는 교회에 달려있습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하려는 이유와 동기-임재를 넘어 영광으로

삼하7:1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성경은 ‘다윗’이 원수를 무찔렀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찔렀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 에 하 나 님 이 주 시 는 샬 롬 이 필 요 합 니 다. 예 수 님 도 평 안 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사사기에선 소위 말해 ‘배 부르고 등 따실 때’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정국의 안녕이 찾아왔을 때 법궤를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나단에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7:2).”

다윗은 이전 세대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평안의 때,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짓길 원했을까요? 사실 이러한 발상은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이 최초로 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6-7).”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도 집에 대해 요구하신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생각을 한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에 영원히 거주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삼하7:6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집이 아닌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니셨습니다. 장막과 성막은 방문하고 잠시 머무르는 portable 개념이자 visitation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집은 habitation 즉, 거주 개념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떠나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집으로 삼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은 개인의 임재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 영광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원한 것입니다. 이 소원은 다윗 왕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이 믿음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겠다고 하는 결단으로 나왔습니다.


다윗 언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계시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삼하7:5).” 이 말은 질문이라기 보단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역대상 17장은 보다 선명하게 이 말씀을 표현합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대상17:4).”

다윗은 그의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합당하고, 누가 봐도

선하고 좋은 동기의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타이밍과 우리의 타이밍이 다르고,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1b-13).” 여기서 “여호와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다윗의 가문이 영존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예수님의 예표이고 그림자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가문은 영원히 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나무와 벽돌로 지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했지만 그것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하나님 집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는 로마제국을 쓰러뜨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보다 하나님의 집을향한 더 큰 열심이 있는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6-17).”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성전을 정화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더불어 다니시면서, 또한 성전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당신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한 열심이 부어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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