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의 회복(요 4:20-26)
사람의 생각대로 드린 예배 –가인의 예배와 웃사가 옮긴 법궤 창세기 4장에는 인류 최초의 예배가 나옵니다.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흠향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이 드린 제사가 ‘믿음의 제사’였다면,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였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죄인 되었던 두 형제가 어느 날 동시에 제사를 드렸다면 제사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와
지시가 있었을 것이고, 이 때 가인이 하나님의 식양을 따르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자신이 수확한 최고의 소산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제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자기의 생각에 따른 제사였을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고 여겼던 제사가 거부되자, 그 분노와 시기가 동생에게 표출되어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역대상 13장에서 왕 위에 오른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잊혀져갔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궁으로 모셔오기 위해 천부장, 백부장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나눈 후 법궤를 모셔오는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수많은 문무백관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레위인들이 행렬을 이뤄 예배하면서 미리 준비한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축제의 행렬은 한순간에 처참한 죽음의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윗은 법궤와 함께 살고 법궤에 익숙했었던 웃사와 아이호가 최신식 방법인 새 수레로 법궤를 모셔오는
것이 좋아보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최선을 다해 예배하며 주님의 법궤를 모셔오는데, 하나님이 웃사를 찢어 죽게 만드시는 황당한 상황 앞에 이해가 안 되고 너무 화가나서 그 곳의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치다’라는 뜻의 베레스와 “힘, 위엄,
능력”이라는 웃사의 합성어로, 이것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그 날, 자기의 힘과 능력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겼던 이를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법궤를 지키려고 했던 그를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예배해야 할 때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중 자신의 상황을 알아 맞춘 용한 선지자와 같은 예수님에게 예배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사마리아 조상들은 이 그리심 산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고 말하는데, 대체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대답으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할 장소”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예수님은 “예배할 때” 에 대해서
대답하십니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할까요? 예배하는 때가 중요할까요?
물론, 예배하는 장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멋진 교회 건물을 건축해놓고, 그 건물 때문에 싸우고, 건물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정장소에만 제한되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온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며, 지금도 당신을 찾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어디든 찾아가시며,
여기에도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배 장소가 중요한가요? 사람이 중요한가요?
형식이 중요한가요? 본질이 중요한가요? 우리는 늘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참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선 잘 갖춰진 시스템도 아니고, 좋은 장소도 아닌, 주님을 갈망하는 예배자가
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예배자들이 예배해야 할 때가 중요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요? 바로 지금,
“이 때” 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 여기서 세월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이로스’로 하나님의 시간대를 말합니다.
‘때가 악하니라’의 ‘때’는 인생들의 시간 개념의 날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들의 때가 점점 악해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시간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이 핑계, 저 핑계대고 미루다가 어쩌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계신 그 곳에서, 골방에서, 일터에서, 부르심의 자리에서 주님을 향한 예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