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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듣고 보게 하라(마11:1-6)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옥에 갇힌 침례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요한은 메시아를 선포한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유대인들이 당황할 만큼 파격적인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해 들으며, 의구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전한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부르심을 이룰 준비가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이 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교회가 교회되고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주제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당신에게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본과 시작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주님을 누구라고 말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군가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리주의와 과학 기술로점철된이사회속에서참된신앙인의삶은이질문과답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제자 양육을 받고 있는데도 부르심을 살아내는 여정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자이자 주 되십니다. 다윗의 위대함과 공명정대가 이 고백의 진정성에 있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추적하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모두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의 수하인 요압이 아브넬과 갈등을 일으켰을 때도, 요압을 바로 벌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 성을 떠나 도망가야 할 때였습니다.충신중한사람이다윗에게여호와의법궤를함께가지고갈 것을 물었습니다. 신성을 상징하는 법궤가 다윗과 함께 있어야 반역을 일으킨 무리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법궤를 그 자리에 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여호와앞에서은혜를입으면도로나를인도하사내게그궤와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아들이 일으킨 반란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법궤가그자리에있는것이맞되,하나님께서다시그의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전히 예배할 것이란 말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초월하지 않기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까? 삶의 순간들이 주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까? 앉고 일어섬을 주님께 맡기길 축원합니다.내가좋은것도싫은것도,사는것도죽는것도,왕되신 주님께 굴복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때로는 무지해서, 때로는 연약해서 주님의 주권에서 어긋나 있을 수 있습니다. 순간마다 주님 앞에 서길 선택합시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주님께서 책임지시는 동행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알리되 –보내심 받은 제자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물은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제자도의 핵심 키워드는 ‘가라’입니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이 명령을 받기 위해 배우고 또 배우며 훈련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신앙생활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마음을 듣고 삶의 방향성을 점검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 받으며 훈련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각자의 가정과 일터, 부르심의 영역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의 또 다른 표현이 사도적 교회입니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들을 뿐 아니라 보아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살아낸 것이 있어야 합니다. 보내심 받는 제자들의 무기가 바로 ‘듣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들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예수를 보았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도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다 드릴만큼, 예수님이 확실합니까? 그리스도의 영으로 2천 년 전 이 땅에오신예수의못박히심과부활을본자들이증인이됩니다.

우리 삶 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듣고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못듣는자가들으며죽은자가살아나며가난한자에게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요한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결박된 자들이 자유케 되고,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던 자들의 인생의 의미와 종착점을 발견하며, 구부러진 정의와 공의가 바로 펴집니다.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한 그 공간과 시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당신의 나라에 대하여 이사야서 61장 말씀을 인용하여 다시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나를보내사포로된자에게자유를,눈먼자에게다시보게함을 전파하며눌린자를자유롭게하고주의은혜의해를전파하게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주님을 주목하고 있는 회당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죽어서 갈 천당, 곧 내세에 대한 소망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의 핵심에는 이미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승과 저승의 개념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서 갈 천당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 날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 환자가 깨끗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닌, 죄의 저주를 의미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상함과 깨어짐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으로 드러내시며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하는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하길 축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죄의 저주와 결박들이 십자가에서 끊어집니다.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신 성령님으로 영광스러운 주님의 나라를 오늘도 나타냅시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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