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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참된 예배의 결과(요4:19~26)

세상을 살리는 예배의 조건 –첫째, 신령의 요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 본문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에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영(신령)과 진리(진정)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기 원하시고, 친밀한 사귐을 갖길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육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속 최고의 예배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구약의 사람이었으나, 신약의 사람들도 알지 못했던 예배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후 국가 차원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24’란 숫자 개념을 바탕으로 288명의 예언적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24시간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게 했습니다. 다윗은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예배, 천상의 예배를 본 것입니다. 그는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드리며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보좌의 예배를 모형삼아 다윗의 장막을 세우고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위대한 예배가 드려질 때, 가장 강력했습니다. 예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금식의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금식은 우리의 육적 활동을 제어하여 하나님께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육적 활동을 중지시키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속사람 영이 작동하게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기도합시다. 특별히, 방언으로 무시로 기도합시다. 우리의 육적, 혼적 기질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때,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될 수 있도록 중재하시고 내 지정의가 잠잠하도록 영적 힘을 주시는 분, 성령님을 구하고 의지하여 기도하며 주 앞에 나아갑시다.


세상을 살리는 예배의 조건 –둘째, 진정의 요소

두 번째는 진리의 요소, 곧 말씀에 대함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사랑하고 그래서 말씀을 읽는 것에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씀을 여러 번 읽고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성경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할 기준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말씀에서 벗어난 우리의 삶을 돌이키고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실제적입니다. 말씀이 없는 영적 체험은 어둠의 영의 작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리가 기준으로 세워지지 않았는데 영적 세계를 탐닉하다가, 어둠의 영의 활동을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빛과 어둠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그래서 진정성을 회복시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말씀, 즉 레마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기록된 그 자체인 로고스와 성령으로 로고스 말씀이 해석되고 적용되는 레마와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성경 말씀이 로고스에서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 영을 작동시키는 레마로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스러워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아를 죽였음을 기억합시다. 말씀이 성령안에서 열리고 풀어지지 않는다면, 전통과 종교가 생명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말씀되게 하십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읽으며, 성령님을 구합시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기도가 기도되고 말씀이 말씀됩니다.


보내짐의 이유, 아가파오

우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얼어붙은 이 땅에 하나님의 불을 전하는 예배의 용광로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와 능력, 목적은 영원한 존재를 향한 영원한 사랑, 바로 아가파오입니다. 흔히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여 사랑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먼저는 가장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사랑, 에로스입니다. 다음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필리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했고, 또 계속 경험해야 할 사랑은 바로 아가파오입니다. 아가파오는 원수도 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인간적인 결정이나 의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경험한 자들만이 아가파오 사랑을 알고, 아가파오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 위대한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누가 뺨을 맞고 모함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영혼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축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한 이유로 처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나를 고발하여 넘긴 그 형제를 용서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의 코이노니아 안에서 누려지는 사랑입니다. 영광의 코이노니아를 맛본 자들은 그 깊은 사랑 안에서 영혼을 사랑하게 됩니다. 구령의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광의 코이노니아를 누리게 됩니다. 코로나19 이후, 예배에 목마른 자들이 생수를 찾을 것입니다. 얼어붙은 이 시대를 살리는 예배의 용광로가 됩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 영광이 경험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