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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정욕을 정복함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성경이 말하는 육신의 정욕의 일들

40일을 주야로 금식하신 예수님께서 육체의 생존 본능이 극한으로 몰렸을 때,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도전해 옵니다.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육의 근본적 욕구와 균형이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대적하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이 시험은 오늘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매순간 싸워야 할 씨름일 것입니다. 갈2:20의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날마다 선택하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새 생명이 삶을 주장하는 정도가 곧 신앙의 깊이이고 크기입니다. 이 본질적인 덕목을 이루기 위해, 먼저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육의 정욕이란 식욕, 수면욕, 성욕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음행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 ‘육체의 일’이라 말하며, 에베소서 4장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합니다. 분쟁하고 시기하며 떠들고 비방하는 모든 일이 우리가 싸워야 할 육에 속한 일인 것입니다.

첫째, 거듭남

그렇다면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일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자 하는 영적 본능은 어떻게 극대화 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거듭나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나’가 아닌, 영으로 다시 태어난 ‘거듭난 나’로 살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을 택하며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죄성입니다. 거듭나야지만 이 근본적인 죄로부터 생명의 일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내 안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육체로만 살아가던 이전의 나와 충돌하며, 육의 일과 영의 일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충돌 자체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요한복음 3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내 안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됨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바람을 느끼고 인지하듯,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예수님께서 주인 되심으로 일어나는 내적 충돌과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이 씨름을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나’에 끌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이 말했듯, 아직 영적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거듭나야, 육이 죽는 삶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생명만이 죄의 바이러스에 물든 육체와 나를 분리시킵니다.

둘째, 영을 따라 사는 삶

두 번째, 육신의 정욕을 죽이기 위해 우리는 영을 따라 사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정수와 같은 로마서 8장에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시면, 죄로 인해 죽어있던 영이 살아나서 생명을 따라 움직입니다. 거듭나기 전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비어있던 영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왕으로 좌정하시면서, 속사람 영이 살아나 육의 생각을 몰아내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난 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영으로 육의 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할 것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기까지, 육에 매이지 않도록 씨름하며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반복되는 이 싸움이 로마서가 말하는 ‘산 제물의 삶’, ‘예배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거듭난 우리는 세상이 아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말이 아닌 말씀을 기준 삼아, 진리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조롱과 위협에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예배자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도구와 시스템 –공동체, 광야, 경건 훈련

마지막은 하나님의 세 가지 시스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체가 가진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육의 정욕들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세가지 장치를 만드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공동체, 에클레시아로 부름받은 교회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서로 주고 받아야할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함께 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사랑과 기쁨이 있기도 하지만, 질서와 권위가 있고 때로 희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코이노니아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과정과 시간을 통해 우리는 육신의 기질을 죽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며 사랑하고 용납하고 인내함으로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일이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나의 연약함이 몸 안에서 나누어 질 때, 또한 나와 같은 자들의 연약함을 품을 때,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시스템은 광야,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훈련의 시즌입니다. 외롭고 힘겨워 보일지라도 이 시간은 결코 낙심과 좌절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값진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삶을 몰아가실 때, 두려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피해가려고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지도 않길 바랍니다. 광야의 모든 순간을 묵묵히 걸어갈 때,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던 정욕들이 버려집니다. 마지막은 경건의 훈련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육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영적 성장에도 관심과 열정을 두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재정을 투자하고,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값 지불을 해서라도 영의 근육을 키우는 기도와 말씀의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한 번의 예배도 고민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는 이 때, 기도와 예배와 말씀의 힘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영으로 육을 다스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승리하는 자로 함께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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