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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주자의 외침

마태복음 3:1~10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선두주자의 삶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삶

지난 주, 우리는 침례 요한의 삶을 통해 광야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시대적 부르심과 사역적 정체성을 점검하고 선두주자의 진정한 의미를 나누었습니다. 선두주자는 그저 새로운 시도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거나, 예언적이고 개척적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선두주자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자가 입니다. 이 교회는 침례 요한처럼 선두주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암흑 같은 시대에 홀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잠든 주님의 신부와 친구들을 깨워 예수님의 혼인잔치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광야로 나간 우리의 메시지는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광야로 나아간 자들의 두 종류 모습

영적 광야의 때가 있습니다. 혹, 더 실제적인 광야로 삶 자체가 던져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내모시는 특별한 때입니다. 나의 계획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된 광야의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본문에는 두 가지 모습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는 자들입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죄란 나를 만족시키는 듯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듯하나, 그 삯인 사망의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한동안은 죄의 일들이 편하고 만족스럽고 즐거울 수 있으나, 결국에는 뼈마디까지 저리게 하는 고통의 값을 치뤄야 합니다. 침례 요한의 외침은 죄의 멍에 아래 있던 자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벗어버리려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죄의 일을 버리고 이 고통의 삯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이키자!” 그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광야에서 죄를 토설하며, 하나님을 붙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7절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회개하기 위해 광야로 나아온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요한의 외침이 옳은가 살피기 위해,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견주기 위해 나아온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보자마자, 엄히 꾸짖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우리에게 광야는 사람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며, 우리의 관심과 열정이 더더욱 주님의 임재를 향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면 절박한 자, 임재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 그래서 수치를 당하고 값을 치르더라도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선두주자 메시지의 핵심 -바르고 참되고 깊은 회개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요한의 외침의 중심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선두주자 메시지의 핵심에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라면, 요한은 회개를 위한 물의 침례를 앞서 베풀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예수님의 다시 오길 길을 예비함으로 선두주자가 외쳐야 할 메시지, ‘회개’를 바로 선포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세가지 포인트를 분명히 잡아야 합니다. 첫째는 ‘바른 회개’입니다. 바른 회개는 죄를 죄로 깨닫고 인지하는 지적 영역의 변화입니다. 감정적 후회나 한탄이 아닌, 진리가 기준으로 삶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척도가 되어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고 말씀으로 반응하는, 바른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두번째는 ‘참된 회개’입니다. 진리가 기준으로 세워졌다면, 그 열매로 의지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길을 바꾸었다면 그 목적지가 달라지는 것처럼, 내 감정과 가치관이 아닌 ‘말씀’으로 죄를 정의하고 인정했기에 죄에서 돌이킨 열매가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깊은 회개’입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죄의 생각들,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까지 드러내어 버리는 회개입니다. 이는 마치 8복의 6복을 받은 자와 같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윤리적 수준의 잘못과 상식 수준의 죄성을 넘어, 보이지 않게 깊이 감추어진 죄의 감정과 동기와 목적을 모두 토설하는 깊은 회개를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이들이 신령한 영적 세계, 하나님을 비로소 볼 것입니다.

회개를 방해하는 세가지 요소

예배당에 와서 앉아있다 할지라도, 각종 교회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았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가 그리스도인의 시작입니다. 본문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경고합니다. 그들처럼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는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지식에 근거한 착각입니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경을 배운만큼, 아는만큼, 자신이 죄와는 멀리 떨어진 거룩한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여 진짜 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두개인의 영성, 곧 세속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영성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만족하려 합니다. 이러한 기복주의, 세속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잠들게 합니다. 마치 개구리를 요리할 때 개구리가 놀라거나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물의 온도를 올려가며 결국 죽게 만드는 것처럼, 이 땅에 속하고자 하는 안일함과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바람들이 우리의 영을 하나님 나라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특권의식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선민 특권이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내세우며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실상을 가렸습니다. 전통주의, 영적 우월감과 교만은 우리로 진정한 회개에 도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사, 장로 집안이라는 배경 자체가 나의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집안 환경과 배경에 기반한 안도감이 진리보다 우위에 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위해 선조들이 쌓아 주신 영적 유업들이, 어리석은 우월감이 되지 않도록 깨어있길 바랍니다. 오직 진리로 살아가야 할 때 입니다. 진리가 기준으로 세워질 때 임하는 진정한 평안을 경험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