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람을 강건케 2
에베소서 3:14~19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두 번째 기도의 시작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 아버지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에베소서 전체를 받치는 두 기둥 같은 기도 중 첫 번째에 해당되는 1장의 기도를 나누어 왔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 체계를 잡아줄 신학의 깊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제, 3장 후반 이후로 에베소서의 두 번째 기도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하늘의 예정된 계획과 우리의 정체성 등 앞서 묵상했던 ‘신학’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는 ‘신앙’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시작인 3:14~15 본문을 봅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를 부르며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선포함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막연하지만 어딘가에 있을 초월적 존재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미신적 믿음의 존재도 아닙니다. 바울이 선포한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뿌리 되심을 말합니다. 모든 민족과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 되심을 말합니다. 모든 족속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경영하시고, 오늘도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기도를 시작하길 축원합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넘치도록 능히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깊은 ‘신앙’을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먼저 주목하게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는 분이십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두 가지
바울은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선포한 후, 16절 이후로 기도의 내용을 풀어갑니다.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베소서의 두 번째 기도는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한 간구입니다. 속사람은 우리의 본질적 실체입니다. 지성이나 감정이 아닌 ‘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내면의 속사람, 즉 나의 실체인 영이 강건해 질까요? 다음의 두 가지를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는 성령님을 주장하는 삶입니다. 이는 성령님을 내 삶에 초청하고 환영하며, 성령님이 아니면 더 이상 내 삶이 꾸려질 수 없음을 인정함을 말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성령님이 두나미스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으시고 행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고 내 삶에 개입하시도록 구하고 주장할 뿐 아니라, 그의 권능이 임하도록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행1:1~8을 봅시다. 누가는 본문 5절까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구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8절 이후로, 성령님이 임하시며 그의 권능을 받아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성령님을 주장하는 삶과 성령님의 권능이 풀어지는 삶, 이 두 가지 기도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 아버지 하나님이어야 함입니다. 물론, 성령님과 우리가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성령님께 기도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기억합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기도의 응답을 이루시는 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때를 결정하시는 분. 바로,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 일이 아버지의 권한임을 분명히 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코이노니아로 존재하시며 삼위일체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기도도 성령님과 대화하는 기도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기도가 구별됩니다. 이 분명한 기도 안에서, 성령님을 구하며 성령님을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주장하며 그의 능력이 풀어지도록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강건해지기 위한 세 가지 작업 –첫째, 성령의 부어짐
성령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성령의 부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구원을 말함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성령에 잠기는 일, ‘성령 침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 곳의 성도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도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백했으나 아직 ‘성령이 내린 일’이 없음을 보고, 성도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합니다. 사도행전 19장의 바울도 믿음과 성령 침례를 구분하여 말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 예수님을 주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침례는 우리로 신앙을 고백하게 하신 성령 안에 우리의 영혼육이 잠김을 말합니다. 구원과 동시에 성령 침례를 경험하는 분도 있고,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성령 침례를 경험하는 분도 계십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 침례로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시작하는 점입니다.
성령으로 강건해지기 위한 세 가지 작업 –두번째, 성령 충만
성령님께 잠기는 일, 즉 성령 침례 이후로 또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침례가 일회적인 사건이라면, 성령 충만은 지속적인 삶의 여정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넘치게 임하시는 사건이 일어난 후, 그러한 상태를 지속함이 성령 충만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침례를 받은 제자들이 성령안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다가, 세상의 핍박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때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 충만은 성령의 침례 때처럼 성령 안에 우리가 온전히 잠겨서 주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침례 이후, ‘성령의 충만함’이 명령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가득 채우셔서 넘쳐 흐르는 ‘성령 충만’을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강건해지기 위한 세 가지 작업 –세번째, 성령께 순복함
마지막은 성령을 따라 복종하는 삶입니다. 성령의 침례 이후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님의 운행하심이 서로 부딪치는 싸움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님께 순종해야, 성령 충만이 유지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거스르려 하는 육신의 연약함이 올라올 때 마다, 주님께 순복할 수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는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해, 우리는 육의 소욕들을 십자가에 계속 못 박으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시도록 순복해야 합니다. 2019년, 주님의 메시지는 성령으로 사는 삶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성령님을 주장하고 그의 권능이 임하며 풀어지길 사모합시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강건케 됩니다. 주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매순간 청종하여 따라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