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와 선지자의 터4

2018-10-14

 

 

에베소서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학적 울타리 안에서 발견하는 부르심의 공동체

온전한 교회로 온전한 성도들이 함께 지어져 갑니다. 이를 위해 에베소서 2장은 ‘산 자’와 ‘한 새 사람’이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이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함을 또한 말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이미 나누었듯,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 주님의 생명으로 서로 연결되며 그 사랑과 질서 안에서 절로 열매맺음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이 비밀한 말씀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되기 위해, 보다 실제적인 의미들을 나누려 합니다. 사실, 이 본문은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의 선포와 맞닿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새로운 부르심의 삶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입술에서 선포된 교회, ‘에클레시아’가 당신의 소유이며 당신의 뜻 안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터로 놓여질’ 부르심을 받고 그에 응답한 자들과, 그들 위에 놓인 모퉁잇돌에서 서로 연결되며 쌓아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란 직임적 역할을 감당할 자들은 이처럼 함께 지어져 가는 자들의 신학적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또한 부르심이란 공동의 목적과 갈망의 바탕이 되어줍니다. 만약 내가 A라는 교회에 속해 있다면, 내 삶의 부르심은 주께서 A라는 교회에 주신 부르심과 동일할 것입니다. 교회의 터가 되는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 위로, 동일한 부르심을 함께 쌓아가며 주께서 거하시는 하나의 처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모든 신학의 근간이자 사도와 선지자의 증거는 곧 예수님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흔들릴 수 없는 이 근원, 곧 십자가와 그리스도 예수 위에 각 교회의 소명과 부르심으로 임하는 신학적 주제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각각의 신학적 주제에 동의하며 또한 함께 이를 이루어갈 자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듯, ‘교회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교육시설이나 프로그램을 비교하며 교회를 고르고 있다면, 또는 편의 시설과 사회적 관계망을 기준으로 교회를 고르고 있다면, 그는 교회를 진정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 쌓아져 가는 연결에서 벗어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금세 빠져버릴 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교회에 부어주신 소원들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연결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교회가 심고 있는 사역과 비전에 얼마나 동의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그와 얼마나 연결되어 있나요? 각 교회에게 주께서 나누어 주신 신학적 부르심과의 일체. 이것이 교회를 이루는 우리의 대답이며, 방법입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나누는 위탁과 의탁의 공동체

두 번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함은 성도와 교회의 의탁됨과 위탁됨을 말합니다. ‘의탁’이 어떤 대상을 신뢰하며 의지하여 나를 맡김을 말한다면, ‘위탁’은 이런 의미에서 좀 더 법률적이고 행정적인 상황 차원의 맡김을 말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의탁과 위탁의 공동체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의 사도적 리더십에 대한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적 부르심과 역할을 맡은 교회의 리더십은, 한 마디로 아비여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영혼을 품고 낳으며, 길러낼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이는, 해산의 수고와 같습니다. 피를 짜내듯, 온 마음과 열정과 모든 희생으로 낳고 길러낸 복음의 열매들이 있길 축원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헌신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는 세상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며,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즐거움이자 안정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가늠하는 기준에, 영적 가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풍요를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경험합니다. 가장 먼저,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얼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주님과 깊이 동행할수록, 평안과 기쁨이 우리의 삶 가운데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함께, 또한 수평적 관계들이 있습니다. 이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가족들을 다음의 경우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아비들과, 동역자, 자녀들입니다. 영적 아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들의 자녀들을 돌봅니다. 그들의 시간과 재정과 마음을 영적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합니다. 영적 자녀들이 자라날 때까지 인내하며 그들이 넘어질 때는 일으켜주고, 길에서 벗어났을 때는 붙잡아 이끌어 주고, 말씀을 가르치고 본을 보여 길러냅니다. 그렇게 자라난 자녀들이, 또 다시 아비가 됩니다. 영적 아비들에게 받은 사랑은 자녀들이 또 다른 자녀들을 낳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적 아비들이 많은 공동체는 그만큼 풍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사랑의 전수가 성도의 삶을 풍성케 합니다. 종종, 교회로만 존재하는 이 풍성한 삶의 비밀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듣기 좋은 말씀과 적당한 교훈을 얻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는 고아의 영과 과부의 영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마치 아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신랑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듯, 원수들에게 갈취당하고 그 삶이 곤고해 집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을 ‘우리’로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몸을 이룬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의 연합 속 능력을 우리 삶 가운데 풀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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