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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영적전쟁 1

에베소서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었더니

<만물을 충만케 하기 위해 세상과 구별된 교회>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세 전에 예정하신 그의 뜻,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말하던 에베소서 1장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 말하며 맺어집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세상에 드러납니다. 교회를 통해 운반되며, 교회로 인해 확장됩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땅을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던 어둠을 내어 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승리에, 당신의 아들들이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전진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빼앗긴 하나님의 것들을 회복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거대한 바벨론을 내세워 우리가 전쟁을 피하거나 미루도록 속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작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에 능력도 없고, 관계도 좋지 않고, 여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느껴져 주눅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크신 하나님을 보길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둠의 나라를 부수고 이길 승리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영적 전쟁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소리를 발하면, 주님의 생기가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2장은 이 위대한 교회가 어떻게 온전해지는지 풀어낼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는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단장되어야 할까요?

<영적으로 죽은 자 –하나님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천지가 지어지던 세계의 중심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권세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충만함으로 서야 할 교회 속, 우리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며 시작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자들, 즉 영적 전쟁의 주체로 우리를 분명히 지목한 바울은, 2장을 열며 우리가 죽었던 자였음을 말합니다. 이는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이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전에 우리가 시체와 같이 아무런 영적 기능과 활동을 못하는 상태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어둠의 세계가 분명히 있으며 그 악한 영들이 열린 틈을 타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귀신에 붙들린 무당들도 종종 미래를 내다보며 예언적 말들을 내뱉기도 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영적인 꿈을 꾸는 경우도 많습니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창조자 되신 아버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순종과 대치의 구도 안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형벌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영생입니다. 즉, 우리가 전에 죽은 자였다는 바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던 자였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드리기 전, 우리는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던 죽은 자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난 자라면, 영생을 얻은 자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할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을 주님이 얼마나 주관하고 계십니까? 살아있는 듯 하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은 분명, 주님의 주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살다보면, 점차 가사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를 엡5:14은 잠자는 자라 말합니다. 깨어나길 축원합니다. 배도는 꼭 신사참배 같은 행동만이 아닙니다. 우리 영의 상태가 주님과의 연합에서 멀어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면, 이미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영생안에 거합시다. 하나님과 화해된 우리의 삶이 주님과 충돌하며, 주님을 대적하는 죽은 자와 같지 않도록 깨어있길 축원합니다.

<죽은 자의 특징 –세상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산다> 이어지는 2절은, 영적으로 죽은 자의 모습들이 어떠한지 말합니다. 이들의 삶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종종, 바벨론이 세운 기준을 아무런 씨름없이 응당 받아들이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들은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이 정도는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 정도는 타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그에 만족하지도 못합니다. 외모, 학벌, 돈, 권력, 인기가 나의 열정과 시간을 얼마나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 기준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신 기준이 아니라면, 모두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풍조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물살에 휩쓸려 갈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결국,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됩니다. 시대와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적당히 응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종국에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마귀의 종 노릇을 하게 됩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며 사탄을 즐거워 하는 문화 속에서, 사탄을 높이는 가치관으로 삶을 채워 버립니다. 트렌디하다는 말에, 속임이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그들의 삶은 세상을 놀라게 하며, 세상이 동경하게 된 트렌드 자체였습니다. 사자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그 마지막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는 평안의 미소를 보며,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의 도를 궁금해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에 호기심을 보이다가, 알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 돌이키는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따라가는 자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는, 따라오게 합니다.

<죽은 자의 결과 –육을 따라 사는 진노의 자녀의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3절을 읽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결국 육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진노의 자녀들에게 속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을 세상의 풍조에 저항할 힘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 스스로 육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삶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조종 아래에 끌려다니면서, 한 편으로는 마귀가 차려놓은 많은 것들 중 이것 저것 골라가며 사는 것입니다. 육이란, 오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내 철학, 내 가치관, 내 기호, 내 스타일, 내 습관까지 육에 속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내가 만들어내고 정립한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육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에는 진노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열매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우리의 삶이, 육의 끌림대로 따라 가는 삶과 반대편에 있길 축원합니다. 마귀가 만든 가치와 문화를 넘어서, 또한 나의 정욕과 기질도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영의 삶을 살길 축원합니다. 기도와 예배와 말씀과 성령으로 나를 죽이면, 생명이 열매맺습니다. 육을 이기고, 영으로 삽시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주님이 나를 통치하게 합시다. 이것이 주님과 연합된 영생의 삶, 산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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