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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

에베소서 1: 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들의 격 –첫째, 충만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 창세 전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중심에 당신의 아들들을 두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 위대하고 비밀한 창조의 계획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의 장대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앞서 나누었듯,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랑과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본문은 이 위대한 예정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은, 그러한 복의 모습들을 단편적이나마 보게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삶을 봅시다. 그의 삶에는 특별히 물질의 복이 있었습니다. 이는 산상수훈 말씀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복입니다. 이삭에게는 특별히 심령의 복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이삭은 힘들게 파 놓은 우물들을 빼앗길 때, 싸우기를 거절하고 또 다시 우물을 팠을 뿐입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이삭의 온유함으로 인해 오히려 대적들은 이삭이 손을 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며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 천사와 씨름을 했던 야곱에게는 신령한 복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들들을 향해 예언한 것을 따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서게 됩니다. 이 모든 복들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그 부르심대로 굳건히 서야 합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창1:26~28 말씀처럼 우리가 땅에 충만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 창조된 존재란 점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이 땅과 생명들을 막무가내로 훼손하고 도륙하는 것이 응당한 권리라고 여겼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 창조’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동물을 사람의 격으로 놓고, 그렇기에 사람도 동물과 자연의 일부라 여기는 모든 일들도 잘못임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은, 그 어느 피조물에게도 주어진 적 없는 선포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충만하며 다스리는 분이셨는데 육과 영을 가진 사람이란 존재에게 이 일이 공유된 것입니다. 우리는, 기능을 행하는 천사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물며 동물과 자연의 일부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에게만 속하였던 다스리는 일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이 땅을 경영하는 자로, 아들들을 지으신 것입니다.

<아들의 격 –둘째, 신의 성품에 참여할수 있는 존재> 또한 기억할 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구별된 특권을 받은 존재란 점입니다. 창세기 1장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표현은 아담이 셋을 낳을 때 다시 사용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그의 씨로 아들을 낳았듯이, 하나님은 그의 씨를 우리안에 두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DNA가 아담이 셋을 낳았듯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발동되며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들에게만 주어진 또 다른 특권은 하나님의 형상인 아들이 그 씨의 본체되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창조주의 성품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마음과 교감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개가 짖거나 꼬리를 치거나 안기거나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행동을 관찰함으로 감정의 표현을 어느 정도 읽는 수준이 아니라, 깊은 마음들을 느끼고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신과의 교제 대상이 우리인 것입니다. 이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영적 존재일 뿐 아니라, 교제의 대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영 안에 성령께서 임하사, 신의 성품이 내 생각과, 판단과, 감정을 덮어버리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안에 성령께서 좌정하실 때,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아들에게 주어진 권세 –아버지와의 동등권한을 받은 자> Sonship의 핵심 메시지에 더 다가갑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격으로 지어진 우리에게는, 더 특별한 권세가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동등 권한이 나누어 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10장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들고,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며 분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잘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라 말씀하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며 당신과 분리하여 말씀하셨고, 다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계속하여 발견되는 부분들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당신이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라 말하는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죽이려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장자가 가진 특수성, 곧 아버지와 동등 권한을 가진 자로의 위치 때문입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장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장자권을 두고 다툰 이유도, 장자의 권한이 곧 아버지의 권한과 동등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께 큰 아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권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외한 이 땅의 하나님입니다. 전능함, 무소부재하심, 완전한 거룩함 등 같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제외한 공유적 속성을 가진 이 땅의 하나님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고 경영할 아버지의 권한이, 아들된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아들들의 회복과 이 땅의 회복>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동의를 해야, 하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교회가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움직이는 다윗의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도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이는 교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회복된 교회입니다. 이 땅의 회복이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이 땅을 저주에서 자유케하고, 고통에서 풀어주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생기를 대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학교에, 직장에, 아들의 권세로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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