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밝히사 5

2018-5-06

 

 

에베소서 1: 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가 깊어지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에 따라, 매주 에베소서 말씀으로 교회가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지혜와 계시의 영이 마음의 눈을 밝히사 보게 하는 두 번째, 성도 안의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영광’이라는 신비하고 광대한 주제를 두고, 먼저 많은 성도들이 깊어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나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님과 깊이 동행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음의 세 가지 이유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가 성령으로 ‘레마’되어 영으로 영에게 전달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명석한 지식인 일지라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없이 성경을 기록물로 읽는다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이 깊어지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르심의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알지 못하는 성도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란 언젠가 갈 ‘천당’을 기다리는, 지루하고 고되기만 한 여정일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오늘도 내 안에 역사하는 그의 나라로 설 때, 우리는 더 깊은 주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잘못된 복의 개념 때문입니다. 특별히 동양 문화권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복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복은 과시의 삶, 남들에게 보여야 하는 삶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인에게 복의 의미는 ‘주인에게 인정받다’, ‘주인에게 상을 받다’는 뜻입니다. 축복의 어원에 ‘피’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인류의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볼 수 있는 진정한 복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영광,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속성>
그렇다면 본문의 ‘성도 안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신학자와 설교가들도 이에 대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구절’이라 답합니다. 본디 영광이란 주제가 매우 넓고 깊은 신학적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또한 단편적인 사건으로가 아닌 장차 경험할 위대한 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구절의 문법적 해석을 살펴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두 가지 모두의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이 문장을 쓴 것 같습니다. 좀 더 쉽게 이 말씀을 풀어봅시다.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영광의 풍성함을, 또한 그의 소유인 우리가 알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영광의 풍성함이 그의 나라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질 것이며, 또한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원래 영광은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며, 존재 방식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그의 산물입니다. 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그의 소유인 교회와 성도로 알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는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견디어 내고 있는 이 고난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한 영광이 올 것이라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영광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상상 이상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잠깐의 것이 아닌, 보이지 않으나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부르심의 여정을 다 마치고 영과 육이 분리되는 날, 우리 주 예수가 오시는 그 날에 볼 위대한 영광을 교회가 오늘도 바라보고 취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알도록 기도하는 이유 –첫째, 영원하고 궁극적인 복을 위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영광을 알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마음에 새겨봅니다. 바울은 왜 마치 영하의 날씨를 경험한 적 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에게 눈을 설명하는 듯, 에베소 교회가 영광을 알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이 말씀처럼 영광을 알기를 기도해야 합니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복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을 읽다보면, 이 땅의 축복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때로 물질을 운반하는 자로, 고아와 과부를 먹일 수 있는 능력과 위치를 받은 자로, 은사와 기름부음 받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은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흔들림 없이 영원한 유업,  땅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사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 없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두려움 없이 사자에 물려 죽은 그들은 주님과 영광을 나눌 자들입니다. 히브리서는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는 것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위대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장이 말하듯, 하늘의 것을 찾고 바랍시다. 이 영광을 잊을 때, 더 비싼 옷을 입고 더 넓은 집에 사는 것을 복이라 착각하며 영원한 상급을 잃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안락함을, 잠시의 부요를 영광으로 대체하지 않길 축원합니다. 주님은 그의 영광에 동참할 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영광을 알도록 기도하는 이유 –둘째, 시대적 상황들을 돌파하기 위해>
또한 영광을 알 때, 우리는 시대적인 압박들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만약 ‘종교’였다면 진작 사라졌을 강도의 핍박을 300년 동안 받아왔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채 맹수들에 의해 찢겨져서, 불에 태워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보다 더 끔찍한 고문 속에서 성도들이 죽어갔습니다. 바울은 그 박해의 현장 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영광을 교회가 알아야 한다 말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마음껏 모여 예배할 장소조차 없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큰 예배의 처소가 7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건물입니다. 1세기 성도들은 대부분 각 가정끼리 집집마다 조용히 모였습니다. 때로는 지하 카타콤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방신들의 신전은 너무나 화려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의 신전은 20미터 가까이 되는 기둥만 100개 이상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신전을 섬기는 여자들과 쾌락을 즐기는 일이 일반적인 종교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문화와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구별하고, 세상이 당연한 것이라 말하는 즐거움과 권리들을 스스로 금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이 우리의 믿음이 굳세게 서도록 격려합니다. 이 시대,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을 조롱합니다. 교회를 향하여 분노하며 우리가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도록 목을 죄어 옵니다. 우리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목숨같이 사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바벨론의 가치와 기준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주눅 들게 할 때, 기도와 예배의 자리에서 부어지는 영광이 우리로 당당하게 서게 합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인지, 내가 볼 영광의 유업이 무엇인지 선명해지게 합니다. 이 시대, 바벨론의 위풍당당함과 그 즐거움과 자극에 슬그머니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와 예배로 우리의 영혼을 지켜냅니다. 세상은 알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교회에게 나누어진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승리하는 자로 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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