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승리의 비밀 1

2018-1-14

역대상 13:1~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2018년, 전환기에 들어선 우리

오늘 본문은 사울의 왕조에서 다윗의 왕조가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대변혁의 시기에 일어난 영적 전환의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방 민족 블레셋처럼 사람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이 원했던 사울이 비참하게 죽은 후, 새로이 기름부음 받은 다윗 왕조의 출범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법궤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웃사는 죽고, 오벧에돔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전환기는 어떤 이에게 죽음같이 어려운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국내외로 불어오는 변화의 중심에서 맞이한 2018년 우리의 오늘이 주님의 역사를 목도하며 그에 동참되는 기회의 시간되길 축원합니다. 나의 차원을 넘어, 이 나라와 열국이 시대적인 사회변화와 영적 전환의 시기에 놓인 오늘, 새로운 하나님의 일을 기대합시다. 

 

전환기의 승리의 비결 –첫째,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하기
3절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전환기에 승리하기 위해 기억할 첫 번째는 하나님의 법궤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은 사울이 통치하는 20여 년간 한번도 여호와의 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다윗은 그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오는 것으로 자신의 왕조를 여는 것입니다. 전환기의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굳건한 믿음 안에서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 역사를 시작하고 이끌어 가는 분이 우리 주님임을 기억합시다.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약해질 때,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방식을 대체합니다. 하박국을 비롯한 구약의 소선지서들의 논쟁을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당함으로 가득한 시대를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선민이 이방인에게 수치를 당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째서 악인들은 형통하고 선인들은 고통을 받는가? 그러나 결국에 이 모든 불평과 변론의 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가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고백으로 맺어집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고 사람의 말에 기대는 것을 멈추고, 역사의 주관자 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이것이 주께서 택하신 성도가 살아갈 코람데오 신앙입니다. 부유할 때도, 가난할 때도, 박수를 받을 때도, 책망을 받을 때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오늘도 그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역사 가운데 행하고 계십니다. 

 

전환기의 승리의 비결 –둘째, 내 안의 웃사를 발견하고 죽이기
두 번째는 내 안에 숨어있던 웃사를 발견하고 그를 철저히 나에게서 찢어내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을 보면,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른 소가 뛰기 시작합니다. 제사장 웃사는 소가 끌던 수레 위의 법궤를 손으로 붙들고, 그 순간 하나님의 노가 임하여 몸이 찢겨져 죽게 됩니다. 문무백관과 온 이스라엘이 함께 모여 다윗 왕조의 첫 공적 행사를 지켜보는 때, 왜 이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걸까요? 먼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뛴 소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새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새로운 때가 이를 때, 진동을 일으키십니다. 그의 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해, 옛 것들이 제하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하나님의 진동이 시작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주께서 일으키시는 진동 가운데 드러나는 웃사를, 우리는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웃사의 죽음만큼 처절하게 옛 모습을 찢어내야 합니다. 주님은 웃사가 죽음으로, 법궤가 하늘의 방법을 따라 제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웃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신본주의의 반대편에 선 인본주의, 세속주의, 종교주의를 말합니다. 웃사의 아버지 아비나답이 법궤를 그의 집으로 옮겨올 당시, 법궤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조가 들어서고,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에게서 잊혀지면서 법궤는 마치 궤짝같이 변해버렸습니다. 빛바래고 케케묵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웃사는 여호와의 법궤를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블레셋이 우상을 수레에 실어 나르듯, 법궤를 덥석 집어 소가 끄는 수레에 얹어 날랐습니다. 이러한 웃사의 전형적인 인본주의는 또한 세속주의와 종교주의와도 연결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새로운 움직임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의 눈으로만 오늘을 보는 이 세대가 마치 웃사의 모습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전승되지 못하자 블레셋의 방식대로 법궤를 옮기다 죽은 웃사처럼, 이 세대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방법들이 잊혀지고, 세상의 화려함과 전략들이 판을 치는 이 때, 생명과 전통, 진리와 종교를 구분합시다. 생명과 진리는 계속해서 살아나고, 전통과 종교는 십자가에서 소멸되길 축원합니다. 웃사가 죽지 않으면, 우리가 그의 영광 앞에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배어 든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와 종교주의를 찾아 찢어내어, 우리 삶에 새로운 주의 일이 시작되길 축원합시다.

 

전환기의 승리의 비결 –셋째, 오벧에돔의 영성
마지막은 오벧에돔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12~14절은 끔찍한 혼비백산의 상황 중에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먼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13절 중, 개역개정판으로 ‘그 대신’이라 쓰인 단어입니다. 이는 개역한글판으로는 ‘치우쳐’라 번역되었는데, 사실 이 말이 원어에 더 가까운 뜻입니다. 이 구절을 원문으로 보자면, 법궤는 ‘기울어져’, 또는 ‘미끄러져’ 오벧에돔에게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상상해 봅시다. 흔들리는 법궤를 잡은 웃사는 찢겨져 죽고 모든 이들이 두려워 떠는 혼란 가운데, 다윗도 함부로 법궤에 손 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법궤가 오벧에돔에게 미끄러지게 됩니다. 마치 법궤가 스스로 ‘나를 만질 수 있는 자’를 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오벧에돔은 레위인도 아닐뿐더러 유대인도 아닌 가드 사람,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집으로 법궤가 옮겨질 수 있었을까요? 오벧에돔은 다윗의 경호원이었습니다. 블레셋 뿐 아니라 사울에게도 쫓김 받던 다윗이 아무나 자신을 호위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신임을 받을만큼, 충성되고 정직한 자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예배자였습니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오벧에돔은 문지기일 뿐 아니라, 악기를 다루는 자로 레위인의 직무를 섬기기도 합니다. 오벧에돔은 다윗의 가까이에서 그를 보호하며, 다윗이 예배하는 영성도 함께 배웠습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를 섬기며 그 임재와 영광을 함께 경험하였던 것처럼, 그는 다윗이 예배하는 곳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바위틈에서 무릎 꿇고 주를 노래하는 다윗을 보호하며, 그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였을 것입니다. 법궤는 예배하고 기도하는 자를 찾아냅니다. 전환기에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예배와 기도를 삶의 중심에 세워야 합니다. 오늘, 작은 공동체인 우리가 24/7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이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도 법궤가 스스로 우리에게 기울어진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 그의 새로운 여정으로 전진합시다. 2018년 한해, 기도와 예배로 살아계신 주와 동행하며 승리하는 교회로 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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