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사도행전 1: 3~5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Already, but not yet!’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바라며, 또한 동시에 살아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완전하게 존재하면서 또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곳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 육체를 떠날 때 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봅시다. 그 곳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영원한 나라입니다. 마21:31, 막9:47, 막10:15 등이 말하는 죽음 이후 열릴 영원의 세계, 즉 공간적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반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임하는 영역적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는지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통치가 임하는 그 영역이 곧 주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로 이해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도 있습니다. 행8:12과 행28:31, 그리고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풀어주셨고, 세상을 두려워하여 숨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본문 3절은 이 모든 만남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에도, 그리고 제자들과 보내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이후 들어갈 영원한 그의 나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통해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이 땅에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도 확장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종교와 구별되는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이나 작은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택함받은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시고, 영원한 그의 나라 안에서, 위대한 그의 나라로 살도록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오늘 이 곳에 모여 예배하는 이유, 우리가 사는 목적,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까닭과 능력,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세가지 의미와 도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로 택함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그의 나라를 경험하고 또한 그를 확장할 때 임하는 특별한 은혜 안에서 더욱 풍성해 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망과 특권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신성한 의무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길 원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이 땅의 나라만큼이나 분명하게 존재함을 세상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의미, 곧 우리가 밟은 영역마다 실제적인 주님의 다스림이 나타나야 함을 도전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영역들을 생각해봅시다. 회사와 학교,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고 있습니까? 주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 임하는 평강이 있습니까? 애쓰고 노력하고 있지만, 주님의 통치가, 그의 나라가 여전히 멀어만 보인다면 우리는 다음의 마지막 한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의 나라는 세상 속 마귀의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 가운데, 무차별적인 마귀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영역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 받은 우리는, 이를 두고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안에서 죄의 저주와 속박들이 끊어지고 자유와 치유가 선포되는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밟은 모든 땅 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분깃마다, 사탄의 영향력들은 끊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되게 합시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하나도 원수에게 내어주지 맙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능력입니다. 교회로 모여 사랑과 영광의 코이노니아를 누리며, 영적으로 훈련받고, 강성하게 성장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자로 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옮기는 능력, 성령님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며 그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세워지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 4~5절을 주목합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이미 성령으로 시작된 것이기에 성령세례란 말을 굳이 쓸 필요도, 성령으로 전 인격이 잠기는 이 일을 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 예수님은 구원과 별개로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봅시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의 성령의 부어짐을 경험하기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 고백이 동일하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과 상관없이,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행2:1~4의 오순절 성령의 강림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의 바울 역시 성령의 세례를 말합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성령의 세례는 성령으로 구속된 영 뿐 아니라 지성과 의지와 같은 혼적 영역과 육적 영역도 물에 푹 잠기듯, 온전히 성령님의 다스림안에 들어가게 됨을 말합니다. 이는 본문과 같이 구원 이후 임하기도 하고, 사도 바울이나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한 후 거의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역사하고 능력으로 증거되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 성령충만이 필수적이란 것입니다. 성령님은 나의 기질과 이전의 삶의 습관들을 변화시키십니다. 내 방식과 굳어진 생각을 넘어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부터 역사하기 위해, 그래서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일터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기 위해, 성령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말씀과 기도위에 임하는 성령님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성령을 받기 위해 제자들이 행할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내게서 들은 바’ 또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말씀과 기도를 의미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방법을 기억합시다.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증거할 위대한 사도들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택하셨습니다. 주님의 방법은, 피조물의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하늘의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도, 목적도, 소망도 하나님의 나라란 것입니다. 이제, 이 위대한 꿈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머무르고 간구합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합시다. 우리를 온전히 소유하신 성령으로 인하여,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나라로 전진하며 그를 세상 가운데 밝히 드러내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