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라-보지 않고 믿는 자
요한복음20:24-29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믿음의 기적>
성경은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기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거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깨뜨려 버립니다. 바다보다 넓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자비한 심판으로 임할 때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이 66권의 성경이 오늘 내게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어지십니까? 이는 하늘의 기적이 내 삶에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논리적 판단과 이성적 동의나 의지를 넘어, 진리가 진리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기적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은 낙심과 두려움으로 숨어있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몸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의심많은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모두 보았다 할지라도, 그가 직접 예수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주님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도마의 반응은 곧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이해가 되고, 경험해봐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을 공부하듯, 논리와 변증으로 2천년 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현상들과 내 생각과 달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일들은, 오직 예수를 만날 때 받아들여집니다. 나를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는 논증과 실증이 충족되지 않아도 성경이 진리임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를 만나는 은혜의 기적 –첫째, 주님의 주권적인 방문>
오늘 우리가 가진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리는 언제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었나요?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경우를 말합니다. 먼저는 본문의 제자들과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주권적인 주님의 방문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낙심으로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던 제자들 앞에,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바울 역시 그렇게 예수님을 경험한 자였습니다. 살기가 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바울은 하늘로부터 홀연히 임한 빛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저 역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나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허한 심령으로 방황하던 십대시절, 주님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으로 저를 안으며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이름을 들을 일도 없는 집안에서 자란 저를 찾아와, 부인할 수 없는 감격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오늘 무슬림에서 확장되고 있는 복음도 그러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들어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심을 친히 증거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살려야 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날마다 육체의 죽음을 선포하듯, 날마다 살려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삶, 곧 성령으로 사는 영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봅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당신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한다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 명하십니다. 이는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완전한 의를 명하시며 이에 도전케 하시는 주님은 결국 십자가와 성령의 자리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살아내야 할 영적 삶의 방법입니다. 이제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은 완전한 의를 이룬 십자가를 믿으며, 성령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요3:6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었던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로 주어진 생명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입니다. 이 믿음의 시작이자 이 믿음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갈5:16~17을 봅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님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멈추시고, 영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날마다 사수해야 하는 영의 삶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성령님을 초청합시다. 매 순간마다 성령충만을 구합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법.십자가와 성령입니다. 우리의 모든 탐심과 인정을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사람의 것을 탐하고 사람의 정에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로막는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점점 익숙해져가는 육신의 생각들을 더욱 분별합시다. 마치 나인 것처럼 일체화된 육의 기질들을 끊어냅시다. 혼란이 가중되는 이 시대, 언제든 흔들리고 무너질 혼과 육이 아닌 영에 이끌리어 살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날마다 육을 죽이고 영으로 전진합시다.
<예수를 만나는 은혜의 기적 –둘째, 말씀의 역사>
특별한 주권적인 방문으로 주님을 만난 자들이 있다면, 예수님을 만나는 두 번째 기적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은 참으로 살아 역사하는 생명입니다. 20년이 넘도록 수련회를 섬기면서, 저는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아이들의 심령이 변화되고 잠들었던 영이 깨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사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대를 세운 김영길 박사의 믿음의 기적도 창세기1:1을 읽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는 성경 곳곳에서 읽혀지는 비과학적인 각종의 사건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설득시킬 수 없던 성경에 대한 그의 교만한 비판은 어느 날, 살아있는 이 말씀 한 구절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하나님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특별한 영적 체험과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봅시다.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죽은 나사로를 살아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회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답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말씀은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은 변증과 논증과 실증으로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합시다.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의 시간을 사모합시다.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이 또 새롭게 우리에게 역사하길 축원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 –성령으로 믿는 세대>
오늘 본문은 때로 특별한 주권적인 방문으로, 때로는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의 기적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 곧 성령으로 주님을 믿게 된 새로운 세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성령의 역사가 끝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 한 이 본문을 잘못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끝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시기 전, 19~23절로 제자들에게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십니다. 이 때 주님이 말씀하신 22~23절을 주목합시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와 대칭되는 것이 바로 29절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을 때,그와 동행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날을 약속하시며 승천하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천년 전 예수를 오늘도 실존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한 주간 주님과의 더 깊은 동행을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벗어버리고,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주님을 초청하고 환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