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는 것 3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 –육에서 영으로 사는 삶>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가진 바 자랑할 한 가지는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할 미련한 것일지언정,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며 세상을 이기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로 알고 십자가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불완전한 나는 죽고, 온전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세 번째 시간으로 나누는 오늘 본문 갈2:20은 이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 영성, 모든 영적 체험은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앞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원자 되실 뿐 아니라, 나를 온전히 소유하신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된 우리가 생명을 공급받으며 열매맺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가 죽음을 경험하고 또한 이를 훈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를 말씀에 굴복함, 공동체를 이루며 코이노니아를 경험함, 사랑이라는 세 가지의 방법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제 갈2:20 말씀을 정리하며, 문장의 말미를 주목하여 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의 신앙의 농축과도 같은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대칭하며 맺어집니다. 육체 가운데 사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가 아닌 믿음 안에 사는 것. 죽어야 할 육체의 삶은 계속 죽고, 살아야 할 믿음의 삶은 더 풍성하게 살아나길 축원합니다. 육이 아닌 영으로 삶이 이끌리어 갈 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승리를 반드시 경험할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 –육체>
나는 이룰 수 없는 의가 십자가에서 나의 것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하신 그 날까지 이 땅의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죽었다고 외치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나는 육체를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은 이를 단순한 자연적 존재인 육신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갈2:20의 육은 자연계에 남아있는 물질적 요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고 저항하는 실체입니다. 갈5:19~21을 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은 본능을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자 시스템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육의 일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우상숭배, 음행, 주술뿐 아니라 시기하고, 편을 가르고, 화내는 것들이 모두 육에 속하였습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육은 우리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에 저항하며 이를 방해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육을 끊임없이 죽여야 합니다. 내가 죽었다는 선언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의 욕구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저항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알 수도 없게 합니다. 모든 육의 기질과 습관을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모든 육의 일들을 거절합시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로 씨름하셨던 예수님은 주님을 기다리다 잠 든 제자들을 향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은 주님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육이 그를 방해할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육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면, 이를 자연적 현상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도록, 마음과 생각과 육체에 십자가를 계속해서 선포합시다. 교묘하게 역사하는 육의 일들을 깨닫고,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막아섭시다. 삶의 순간마다 거듭난 영이 앞서 우리를 이끌어가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게 역사하는 육체에 속한 모든 것들을 거절하며 십자가를 선포합시다.
<날마다 살려야 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날마다 육체의 죽음을 선포하듯, 날마다 살려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삶, 곧 성령으로 사는 영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봅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당신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한다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 명하십니다. 이는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완전한 의를 명하시며 이에 도전케 하시는 주님은 결국 십자가와 성령의 자리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살아내야 할 영적 삶의 방법입니다. 이제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은 완전한 의를 이룬 십자가를 믿으며, 성령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요3:6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죽었던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로 주어진 생명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입니다. 이 믿음의 시작이자 이 믿음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갈5:16~17을 봅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님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멈추시고, 영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날마다 사수해야 하는 영의 삶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성령님을 초청합시다. 매 순간마다 성령충만을 구합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법.십자가와 성령입니다. 우리의 모든 탐심과 인정을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사람의 것을 탐하고 사람의 정에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로막는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점점 익숙해져가는 육신의 생각들을 더욱 분별합시다. 마치 나인 것처럼 일체화된 육의 기질들을 끊어냅시다. 혼란이 가중되는 이 시대, 언제든 흔들리고 무너질 혼과 육이 아닌 영에 이끌리어 살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날마다 육을 죽이고 영으로 전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