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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안에서 죽는다는 것1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의 삶의 정수-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십자가는 참으로 기이한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그저 불편하고 어리석고 실패한 십자가가 부르심 받은 우리에게는 유일한 구원이며 승리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날마다 경험하며 죽기까지 전한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당대 로마인으로 태어난 그는 현재의 기준으로 박사 학위를 7개는 받을 정도로 박학하였고 율법의 의로도 흠 잡을 것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합니다. 하늘의 기적을 보이고, 수많은 자들을 예수께 돌이키며, 위대한 교회들을 세우고, 성경을 썼을 뿐 아니라 양에 있어서는 신약의 반을 쓴 바울의 삶의 중심에 바로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귀는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사탄이 가졌던 모든 권세와 권리들을 깨뜨리셨습니다. 주께서 이루신 이 신비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내가 죽는 십자가가 생명인 것입니다.

<내가 죽는 삶의 시작-구원자이자 왕 되신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

오늘 본문은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고백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함을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시작이 내가 죽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시며 이제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죽는 것이며, 무엇을 해야 내가 죽을 수 있습니까? 그 핵심이 ‘주재권-Lordship’에 있습니다. 저는 요즘 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세상의 것들이 함께 섞여 복음이라 전해지는 것을 봅니다. 끊임없이 정죄하고, 지옥에 가게 될까 두려워하게 되면 그 복음이 참 복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참 복음과 오염된 복음의 기준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고백함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 삶의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지만, 이 모든 일은 예수께 속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은 나의 요구들을 들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구원자일 뿐 아니라 왕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을 뿐 아니라 그가 그의 피로 나를 사신 나의 왕이자 열방의 왕되심을 믿는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믿음의 동기가 이렇게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한 맺힌 삶을 예수를 통해 역전하고자 주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순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기 위해,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과 분명한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봅시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소유하신 왕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예수님을 문제의 해결자로만 여기는 영적 아이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가 나의 왕임을 고백할 때 복음의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내 능력과 의지로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삶의 모습-삶의 모든 영역 안에 임한 주의 다스림>

이제 우리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를 얼마나 소유하고 계십니까? 나는 나의 어느 부분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접붙여지는 그 시작이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 되시며 또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는 왕이란 고백임을 기억합시다. 7 Mind Molders 또는 일곱 기둥이라 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곱 분야가 있습니다. 흔히 정치, 경제, 교육과 과학기술, 언론, 예술, 가정, 종교로 구분하는 이 일곱 영역은 내 안에도 이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을 주께서 다스리시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정도 교육관과 정치관도 주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경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돈이 내가 벌어서 내가 얻어 낸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어떻습니까? 나의 문화라고 말하면서 내가 즐기고 찬양하는 것이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삶의 주재권을 주께 둡시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굴복시킵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다 드리기에 마땅한 한 분 되십니다. 우리를 착취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그가 왕이 되길 요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주님은 그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루십니다. 영원한 기쁨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합시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살아지는 법-성령으로 사는 삶>

그렇다면 어떻게 육체로 이 땅을 살아가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오고 가는 나의 모든 것이 내가 원한 선택들이 아닌 ‘주님의 음성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성령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성령님은 내 육신의 기질들을 죽이십니다. 학습된 가치관과 습관들도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다. 더 이상 나의 감정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판단이나 의지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십자가의 의로 돌이킨 자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죄에서 나를 의롭게 하는 유일한 구원임을 깨닫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곧 나에서 주로 돌이켰음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닌, 주님을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본문 2장에 이어서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육에서 영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님을 삶의 모든 순간에 초청하고 의지합시다. 날마다 성령님을 주로 고백합시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사는 방법이자 우리로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모든 순간마다 성령님과 동행하길 축원합니다. 내가 죽을 때, 나는 이룰 수 없고 행할 수 없던 것들을 주께서 이루시며 새로운 세계로 이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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