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갑주를 취하라8-평안의 복음의 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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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1-15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구원에서 시작된 총체적 복음>
휘몰아치듯 2017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맞물려 북한, 일본, 중국이 긴밀히 움직이고 있는 오늘, 이 모든 일 이면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일 때 세상과 충돌되는 이 진동은 이미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전쟁이요, 그의 나라인 성도가 취할 분깃입니다. 특별히 이 나라의 어지러운 상황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으로 무장할 것을 선포하며 3주의 시간동안 의의 흉배를 나누었습니다. 구원의 확신 안에서 천국의 소망으로 굳건히 서는 것은 심장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의의 흉배는 십자가로 의인이라 칭함받는 변치 않는 진리로, 우리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원수의 참소들을 막아서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새롭게 나눌 영적 무장인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은 의의 흉배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의의 흉배와 평안의 복음의 신 모두, 복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의 흉배가 구원의 확신을 잃지 않도록 심장을 보호하는 무장이라면, 평안의 복음의 신은 땅을 딛고 서며 전진하는 발을 감싸는 무장으로, 구원을 넘은 보다 넓은 의미의 복음을 말합니다. 천국의 문을 지키는 천사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할 십자가의 의일 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입고, 주께서 승천하사 성령이 부어졌으며, 이제 다시 오실 왕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총체적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5:1~8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 뿐 아니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또한 성령으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인 모든 것을 말합니다. 구원에서 성령의 부어짐과 종국에 온전히 임할 하나님의 나라까지, 총체적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7~11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역과 요한복음 1:29~34의 세례 요한의 선포도 이 총체적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본문 29~31절로 어린 양 예수를 선포한 세례 요한은 이어지는 32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대속제 어린 양일 뿐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임을 말합니다. “또 증언하여 이르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놓은 복음을 준비하여 신어야 합니다. 죽음심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부활하사 죄를 이기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셨으며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의 복음은 전쟁의 날에 우리의 발을 보호하는 신발인 것입니다.
<신발의 의미 -하나님께 속한 자로의 정체성과 부르심.>
흔히 신발이 언급된 성경 본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구절은 창세기 3장과 그를 인용한 사도행전 7장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 정체성을 주시며 새 부르심으로 부르실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곧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나의 꿈과 나의 왕국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신발은 이와 같이 자아, 신분,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할 수 있는 자아로서의 나, 자기 주권, 정체성과 부르심이 신발이 은유하고 있는 뜻입니다. 결국 영적 전쟁에서 신을 신으라는 것은, 하늘에 속한 자된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 부르심이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함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으나, 신분과 정체성의 문제로 공격받을 때마다 주저앉는 자가 있습니다. 원수가 우리의 꺾이어 지고 훼파된 자아를 집요하게 파고들 때, 우리는 복음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주장해야 합니다. 모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길 축원합니다. 완성된 복음, 평안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신분이 되었으며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음을 날마다 선포합시다. 평안의 복음안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회복하며 부르심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의 기능 -안정감, 균형감, 기동성>
바울이 이 글을 쓴 로마 시대의 군사들은 특별한 전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군대의 정렬이, 전투를 위해 전진할 때는 움직이는 성과 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맨 앞줄의 방패병들과 그들 뒤로 또 다른 방패병들이 각각의 방패들로 적들과 마주해야하는 앞에서부터 머리를 덮는 지붕을 만들어 온 전열을 보호하는, 일종의 움직이는 요새와 같은 전술로 싸웠습니다. 이 때 방패 너머로 밀어붙이는 적들을 막아서는 힘의 요소 중 하나가 로마 군사들의 신발에 있습니다. 모래와 바위를 넘어 긴 길을 걸어야 할 뿐 아니라, 무리와 무리가 맞부딪쳐 밀고 밀리는 싸움의 현장에서 버틸 수 있도록, 로마 군병들은 전투화의 바닥에 스파이크를 박고 또한 발목이나 종아리까지 졸라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평안의 복음의 신은 영적 싸움에 나서는 우리가 반드시 준비할 이러한 영적 무장입니다. 힘있고 빠르게 전진할 뿐 아니라 전투의 날, 움직이는 요새의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막아서며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합니다. 이와같은 첫 기능이 안정감입니다. 평안의 복음은 상황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우리를 보호합니다. 들쑥날쑥한 신앙생활에 따라 오르내리는 모든 요동을 멈추고 안정감 안에서 우리가 서게 합니다. 그 두 번째 기능은 균형감입니다. 싸움에 임하기 전에, 먼저 바로 서지 못한다면 애써 갖춘 무장들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기울어지거나 그저 매달린 채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투화는 전투태세를 잡고 전열에 맞추어 서도록 균형감을 잡아줍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의 마지막 기능은 기동성입니다. 경찰들이 범인을 검거하기 전에 신발을 꽉 매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영적 전쟁에 앞서 돌파하며 전진하여 달려갈 힘을 뒷받침 해주는 영적 전투화를 신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완성되는 총체적 복음은 우리를 일으키며 달려갈 힘을 줍니다. 죄를 이기사 다시 오실 주님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날마다 다시 일어나는 능력의 근원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의 궁극적 목적 -복음의 전파>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사52:7의 말씀을 인용하여 로마서 10장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 그를 전하는 자, 복음의 발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복음의 신의 궁극적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화평이 깨어진 세상가운데 평안을 선포하는 복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한번도 복음을 전해본 적이 없다면, 그는 복음의 신을 예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부르심과 정체성과 신분의 문제로 원수가 공격할 때, 절뚝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밀고 또 밀치며 적들과 맞서 버티어내야 할 때,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한주간, 우리를 일으키며 굳게 서게 하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소유하길 축원합니다. 완전한 복음의 신을 신고 오늘도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우리로 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