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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도의집과 더크로스처치의 사명(기도의집 운동의 결과)

마태복음 21:12~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교회는 곧 기도의 집입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가장 먼저 성전 안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며 다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성전 성화 사역, 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전에 이르기까지 제물 삼을 동물들을 흠없이 이끌고 올 수 없던 이스라엘에게, 어쩌면 성전 안 상인들은 종교적인 요구에 따른 꼭 필요한 자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 곧 상한 심령으로 드려져야 하는 제사가 비본질에 의해 변질되자, 본질을 잃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말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값비싼 강대상이 자랑이 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필수가 되어, 진정한 예배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성전이 기도의 집의 정체성을 잃은 것을 보셨을 때 분노하셨습니다. 생명과 종교, 진리와 전통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로부터 말미암은 생명과 진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고 화려할지라도 그는 단지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와 전통일 뿐입니다. 오늘 이 교회가 열방을 섬기는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부르심 받은 본질, 바로 기도의 집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은 어느 한 사역자가 만들어 낸 운동이 아닙니다. 성전에 들어오사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명하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둘 셋의 모임인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로 부르심 받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가 움직이며 이 땅에 임하도록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집 운동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가는 것. 그렇기에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 땅을 향해 달려오는 하늘의 나라를 드러내며, 그 나라가 우리와 우리의 가정과 도시와 나라에 임하도록 요청하고 선포합니다. 이 교회가 전진할 바가 이 본질안에서 더욱 분명해지길 원합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 역시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함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열방중에 풍성해지기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며,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능력인 교회. 그 본질적인 정체성을 주님은 기도의 집이라 부르셨습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회복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유일한 공동체인 교회의 회복, 곧 기도의 집의 회복의 대전제를 알았다면, 이제 이를 통해 일어나는 세 가지 현상들을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보려 합니다. 이사야서 56장의 말씀으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성전을 향해 선포하신 주님은 이어지는 14절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정체성을 잃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해 주님의 선포가 외쳐졌을 때, 곧 교회가 교회의 부르심의 본질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야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는 나라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집이 설 때, 하나님의 나라는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저주는 끊어지고, 구원의 은혜가 흘러가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발동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원합니다. 막연한 천당이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케 하는 실제적인 그의 나라가 이곳을 다스리길 원합니다. 주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이 기도실이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과 같이 치유의 기름부음이 흘러가는 곳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은 기도의 집을 선포하신 후, 그리스도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기도의 집이 설 때, 주님의 이름이 오늘도 역사하는 실제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회복될 때, 주의 오실 길이 준비됩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회복될 때, 우리는 또한 15절과 같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는 만물을 회복할 장차 오실 왕, 주님의 다시오심을 구하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 중 하나는 선두주자로서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25:1~13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신랑이 더디 옴으로 인해 잠이 든 열 처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등의 기름을 준비한 자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도,모두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알고, 은사를 받은 자들도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 잠들 수 있습니다. 선두주자는 다른 사람들이 행하지 않았던 어떠한 일들을 앞서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두가 잠드는 때가 왔을 때 신부를 깨우는 외치는 소리 되는 자입니다. 이 교회가 계속해서 선두주자로서 외치는 소리되길 원합니다. 하늘의 나라에서 눈을 돌려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갈망하도록 깨우는 소리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세례 요한이 있었음을 기억합시다. 그가 광야에서 소리되었을 때, 예수께서 오시는 길이 예비되었습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설 때,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나라를 향한 갈망이 부어집니다. 가만히 스며들려는 바벨론의 향취는 영원한 사랑으로 외쳐 깨우는 선두주자들의 소리로 인해 신부된 교회를 잠들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회복될 때, 다음세대가 살아납니다.>

이제 주님은 성전에서 발걸음을 옮기시며 마지막 16절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8:2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집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하면, 다음세대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회복될 때, 소경은 눈을 뜨고, 잠든 자들은 깨어나며,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주자에 이를 다음세대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포로되어 이방 국가에 끌려갔던 소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가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갖도록 훈련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이 교회가 함께 하는 TCC 학교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레위인과 같은 정체성으로 기도와 예배에 삶의 기반을 둔 아이들이 어떻게 바벨론보다 열배나 탁월하게 서는지, 오직 진리로 승부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일어나는 바벨론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유지조차 못하도록 모든 사상과 제도들을 총동원하여 성도의 믿음을 흔들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주께서 이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전진합시다. 교회가 교회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의 오실 길이 예비되며, 다음세대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기도의 집이 우리 자신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도 세워지길 구합시다. 모든 영역마다 기도의 집이 회복될 때, 이 도시와 나라에 임하는 그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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