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 4 - '지성소 신앙'

2016-6-19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먼저 기도하신 후, 그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산 위에 올라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하시던 주님은 마치 모세에게 성막의 식양을 주셨듯 기도의 본을 몸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기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이 나라에 많은 기도가 있으나 그만큼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방인이나 종교인이 하듯 기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사역의 중심에 다시 기도와 예배가 놓이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전도보다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셨고, 기도하신 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움직이시며 당신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 과부와 같이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느냐“ 물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람의 힘과 지식으로 빠르고 편히 사역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겠으나, 위대한 역사는 교회가 기도로 주님과 동역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승부 보는 하늘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 -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보는 것. 

지난 시간, 만유를 창조하시고 소유하시며 온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우리 앞에 계신 하늘의 하나님을 보며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했다면, 또한 기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 안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히브리어 “압바”, 또는 “아브”라 표현되는 아버지는 우리의 근원자시며 공급자이시고 책임자 되심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또한 기억할 것은 우리의 근원이자 공급자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의 본체 되신 분이란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셔서 용납하시고 기다리시는 자비의 화신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는 이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인내하시며, 우리가 떠났을지라도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신과 인간의 절대적 관계를 넘어서, 아버지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교회가 외치는 십자가 복음은 본질을 살아내기 위한 회복의 복음이지, 정죄의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내 자녀를 지옥에 보내려 율법의 선을 그어놓고 그가 넘어오나 안 넘어 오나 지켜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 만드신 괴짜가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이시며, 자비로 충만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이 말하듯 주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임을 믿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온전한 아버지의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아무리 정죄하여도 벗지 못하였던 죄의 모습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완전한 사랑안에 거할 때,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위대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 - 지성소의 기도.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기도와 같이 우리의 근본되시며 사랑과 자비의 본체이신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부름으로 기도의 시작을 열 것입니다. 하늘의 주관자를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의 이 믿음은 곧 지성소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를 진행하게 된 배경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살펴봅니다. 그들이 분노하며 신성모독으로 주님을 죽이려 든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동등됨을 의미하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돌로 쳐 죽일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장자에게 “내 것이 다 네 것” 이라 하시는 것은 인정으로가 아닌, 법적으로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표기하는 것조차 여호와의 첫 소리만 따서 기호와 같이 표시할 정도로 절대자와 피조물의 관계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사건은 엄청난 진동이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넘어 은혜로 들어오는 지성소의 신앙입니다. 마당을 지나 휘장을 걷어내고 아버지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의 휘장을 찢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멎으실 때, 하늘 아버지는 당신과 우리 사이의 모든 휘장을 찢으시고 아버지의 품으로 우리가 달려가게 하셨습니다. 그 지성소에 들어갈 때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나라와 뜻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으나,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은 예배당에 있을지언정, 알지도 못하는 신적 존재에게 빌 뿐입니다.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들만이 하늘에 속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시작되는 기도는 지성소 들어간 자들의 신앙의 고백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 -성막의 원리.

지성소의 기도는 때로는 육적이고 때로는 혼적인 이방인이나 종교인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걸어들어가는 자는 하늘의 아버지를 경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막의 원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당에서는 양을 잡는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양의 발목을 끊고 가죽을 벗기는 모든 행위들은 한마디로 회개와 자백을 뜻합니다. 종교적 기도가 아닌 아버지와 내가 영과 영으로 만나는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죄의 큰 덩어리들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다가 회개가 깊어지면, 기억조차 못하는 작은 일들까지 토설하게 됩니다. 저 역시 기도의 훈련을 받을 때, 2시간을 기도하던 4시간을 기도하던 그 절반이 회개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버스를 타고 지나치며 본 사람을 쯧쯧거리는 것 하나까지 토설시키셨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죄에 민감해집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옷에 무엇이 튀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회개는 죄에 대해 깨어있게 하고 죄를 싫어하게 합니다. 우리로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죄에서 떠나도록 역사하는 마당에서의 회개 기도를 지나면, 이제 성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소에는 진설병(떡상), 금촛대, 분향단(금향단)이 있는데, 여기서 진설병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음으로 먹고, 암송하여 씹고, 깊이 묵상함으로 삼키는 은혜가 있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씹고 삼킨 말씀은 기도를 태우는 장작이 됩니다. 금촛대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기록이 아닌 영으로 우리 안에 녹아지게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씀이 영이 되어 기도하고 예배할 때, 분향단에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향이 올라가며 지성소가 열립니다. 이제 휘장을 지나 아버지가 거하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기도를 회복합시다. 아버지를 대면하며 하늘이 땅에 임하는 위대한 그의 역사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이 기간, 아버지를 앎으로 아버지를 보며 기도하는 은혜가 풍성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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