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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2

마6:7~9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지막 날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 밤낮 기도하는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산상수훈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기도가 무엇인지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종교인이나 이방인이 행하는 차원을 벗어나 기도의 본질적 요소와 목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이 말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처럼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끝 날의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말씀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멸함 받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찾아야 할 사람들이 영적 세계를 잊고 일상 속에 함몰됨을 말합니다. 주님의 때가 가까울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 두지 않고 나의 즐거움만을 좇으며 영적으로 잠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대들은 또한 이기적인 자들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이 말하듯 고통하는 때가 이를 때, 사람들은 오직 나의 만족만을 추구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자기만을 아는 세상에서 이제 진리는 기준으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선악의 기준이 말씀이 아닌 그들의 육체가 원하는 요구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노아의 때와 같은 이 시대에 잠든 자 되지 않도록 깨어 말씀을 따라 살기를 결정해야 합니다. 설령 그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을지라도, 말씀이 그러하다 하는 것이 우리의 기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은 불의한 재판장에게 밤낮 외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이 오실 가까운 때 양 극단으로 갈라질 교회와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 세상의 패역함을 한탄하며 신랑을 빼앗긴 신부의 마음으로 그의 다시 오심을 부르짖어 구하는 교회가 깨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많은 자들은 여전히 잠들어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부의 삶으로 구별되어 신랑되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거대한 기도 운동이 일어나는 한 편에, 기도하는 믿음을 잃은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야로 기도하는 이 교회가 마지막 날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보여드리길 원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다시 오실 신랑을 위해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동떨어져 그의 나라와 상관없는 기도에서 돌이켜,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는 본질적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로 당신의 나라를 움직이는 위대한 기도를 취하도록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기도가 앞선 5~8절의 종교적인 기도, 미신적인 기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류의 기도는 주님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5~6절이 말하는 종교적인 기도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행한 기도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중심이 있는 형식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기도입니다. 이들에게는 율법과 말씀,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습니다. 말씀과 진리안에서 종교적 행위로 기도하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신령의 요소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8절의 미신적 기도는 이방인들이 행한 기도로, 주문을 빌듯 중언부언하며 그를 이루기 위해 치성을 드리는 샤머니즘적 기도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신비적 체험은 있을 수 있으나 진리, 진정의 요소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와 열심이 있을 뿐 아니라 영적 세계에 이르는 신령과 진정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아시는 아버지께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푸는 다윗의 열쇠를 받은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충만하여 본질을 회복한 기도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풀어낼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실존하신 하나님을 보며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신 후 입을 여신 주님은 먼저 당신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을 분명히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함에 앞서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며 그 분께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도의 흔적을 따라 하늘의 아버지가 아닌, 어딘가에 있을 막연한 대상을 향해 정성을 드리듯 기도합니다. 많은 시간을 열심을 다해 구하는 기도보다 중요한 기도의 본질이 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어디엔가 있을 초월적 존재를 향해 천지신명께 빌듯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시는 그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눈과 눈을 마주치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그 자리에 이미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그 아버지 앞에서 그의 존재를 분명히 바라보며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만물과 시간과 공간의 주관자 주님은 당신께서 기도하는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하늘은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온 세계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실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하늘에서 모든 것과 모든 이를 통치하는 분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시작됩니다. 우주를 붙들고 계신 전능자를 바라보며 그를 고백할 때, 우리의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한 분 앞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하늘은 천지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끝 날을 지나 영원히 계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역시 소유하신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모든 시간을 시작하시고 소유하신 한 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영원하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곳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에서도 온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한 분이 우리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며 그 앞에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 땅에서의 삶에 국한될 때, 우리는 항상 선하시고 옳으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온 우주와 세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도로 그와 동역하는 특권의 기쁨을 누리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