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십자가와 성령
마5:20,4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산상수훈의 실천을 위한 전제조건, 하나님 나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수해오던 예배의 형태가 새롭게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는 예배 형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 온 이스라엘에 선포했듯이, 예수님도 산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새 기준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형제에게 노하면 심판받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즉 이미 간음하였고, 오른편 뺨을 친 자에게 왼편도 돌려 대며,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완전한 의와 온전한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산상수훈의 전제조건인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완전한 의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우리 가운데도 임하는 주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존재 방식과 표현 방식, 그 가치를 모른다면 산상수훈은 아무도 지킬 수 없는 황당무계한 율법서로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새 법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들을 통해 지켜집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살아내는 성도의 삶으로 인해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새 율법의 결론 –첫째, 십자가로 인한 완전한 의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기도하고, 박하와 향의 10분의 1까지 구분해서 헌금하며,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율법 뿐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젖어드는 생각과 마음까지 지켜야 하는 새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그들보다 나은 의를 이룬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새 율법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내면 깊이 숨겨진 감정과 동기까지 보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기준을 우리가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율법서, 마태복음 5장의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새 법을 이루는 결론으로 ‘십자가’와 ‘성령’을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조차 지켜내기 어려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새 율법의 의로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완전한 의를 이룹니다. 옛 율법과 새 율법을 완성하는 유일한 의, 십자가를 붙잡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더할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함으로 범죄 하였고, 그로 인해 불뱀에 물리는 벌을 받습니다. 모세는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놓으면 그것을 보는 모든 자는 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게 되듯이, 십자가를 고백하고 붙잡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조건 없는 이 간단한 믿음의 행위에 종교적 요구를 더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만으로 의로워 진다는 복음이 그들에게는 탐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놋뱀을 보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놋뱀의 머리와 꼬리를 구별한 다음에, 특별히 놋뱀의 눈을 정확히 찾아내야 치유될거야.”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주의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 이외의 또 다른 행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 다른 군더더기가 붙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사, 모든 죄의 저주를 끊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십자가도 있어야 하지만 또 다른 조건도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한 의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의로워 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의로워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원수에게 정죄 받지 않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오직 십자가일 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변화됩니다. 죄와 사망의 율법이 아닌 성령의 은혜의 법이 우리를 묶었던 사망 권세를 소멸시킵니다.
새 율법의 결론 –둘째, 성령으로 인한 온전함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산상수훈의 새 법은 우리를 십자가로 끌고 가는 동시에 성령님을 만나도록 합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이란 ‘샬렘’, ‘타밈’ 이라는 원어에서 번역된 말로 결함이나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함이 없는 자, 흠 없는 자는 곧 율법을 살아내는 의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는 바로 ‘충만한 자’입니다. 조건없이 악인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믿음으로 구제하는 극단적인 신앙을 누가 살아낼 수 있습니까? 충만한 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성령의 아홉 열매는 산상수훈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여는 세 가지 행위, 용서와 사랑과 구제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풀어 놓는 이 세 가지 믿음의 일들이 성령충만의 결과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종착점은 십자가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살아내는 흠이 없는 의인이 되는 방법은 오직 십자가와 성령뿐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결코 율법에 닿을 수 없고, 성령이 아니면 결코 율법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성령으로 우리는 완전한 의와 온전한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유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승리를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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