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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의뢰하라

마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생의 자랑에서 시작되는 헛맹세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새 율법을 선포하시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비롯되는 죄의 새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정욕의 대표적 죄성으로 분노와 혈기를, 안목의 정욕의 죄로는 음란의 문제를 언급하셨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생의 자랑에서 비롯되는 죄의 모습으로 자기 확신과 허영심에 기인한 헛맹세의 문제가 이야기 됩니다.


성경 속 맹세 –긍정적 맹세와 부정적 맹세

성경 속에는 긍정적인 맹세가 있는 한편 부정적인 맹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장에서 쪼개놓은 동물 사이로 불이 지나가게 하면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긍정적인 맹세의 약속이었습니다. 한나가 서원하여 낳은 아들, 사무엘 역시 하나님께 드린 긍정적 맹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여호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맹세를 요청하시기도 합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인해 여호와의 일이 성취되도록 요구하신 맹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즉 모세오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맹세한 일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넘어서는 새 기준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의지로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려 하는 이생의 자랑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항상 기억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4~35절 말씀에서 언급되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를,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기반을 둔 것들, 즉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운영하시는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의지와 결심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높고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신념과 결단으로 어떤 일도 장담하여 맹세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내 뜻이 충돌될 때, 어떻게 하나님을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19를 통과하는 이 시간, 전지구적으로 일어난 재난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더욱 인간적인 의지와 계획과 뜻과 그 맹세들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허영심에 기반한 헛된 뜻을 세우지 않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정하고 내 의로 맹세하면서 스스로 이룰 수 있듯이 말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의 결정과 결심은 하늘을 보좌삼고 땅을 발등상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 굴복될 수 있습니다. 내 뜻과 각오를 선포할 때,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합시다.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하라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어지는 36절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또한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해야 함을 말합니다. 헛된 맹세에는 바벨론을 쌓았던 인간의 교만함과 허영심이 담겨 있습니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정한 뜻을 이루리라는 허영된 마음이 헛된 맹세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 모두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자신의 불완전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다가 블레셋에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왕에게 다윗을 지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해서 목숨을 건집니다. 다윗에게는 ‘나의 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인생의 여정 중에 자신의 한계점과 직면하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오랜 시간 잘 쌓아놨던 멋지고 그럴싸한 의의 모습들은 모두 벗겨지고 악취날정도로 지독한 바닥의 모습이 드러나 보이게 하십니다. 죄의 본성 앞에서, 우리는 그럴듯한 의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는 한순간에도 바닥이 드러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내 자아를 기반으로 한 맹세는 그래서 죄입니다. 하나님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어리석음입니다. 머리털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인정합시다. 내 이름을 내세우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자아로부터 말미암은 맹세는 우리의 수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선을 넘어가지 말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7절 말씀은 이생의 자랑의 죄성이 선을 넘어가기 시작할 때, ‘악’이 열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선 21~32절의 말씀으로 분노와 살인의 영, 또한 음란의 영에 주목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영심과 헛맹세도 어둠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흔히 보는 쇼핑 중독과 노름 중독 뿐 아니라, 이생의 자랑을 끊임없이 좇게 하는 각종 중독에 삶이 파괴되도록 합니다. 코로나-19 이후 더 어려워진 경제 상황 가운데 수많은 투기 이야기들이 들리면서 자괴감과 허무함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세상의 방법을 따라가야 할 것 같고 세상이 말하는 기준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조바심을 느끼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는 것’에서 지나치지 말라는 본문 말씀처럼, 내 능력 밖의 일을 스스로의 확신과 결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며 억지로 해내려 할 때, 어둠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영적으로 무장할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을 주실 때 조급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을 사수하고 주장하며, 모든 상황들을 기쁨으로 통과해 봅시다. 여호와가 우리의 몫이 우리의 것 되도록 하십니다. 모든 종류의 허영된 마음과 두려움이 떠나가길 축복합니다. 헛된 마음이 소멸될 때,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