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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회복의 비전과 부르심 (행28:30-31)

들어가며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0-31).” 이 교회의 3대 부르심 중 하나는 1세기 초대교회의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의 회복과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기억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3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바울이온이태를자기셋집에머물면서...”사도바울은온이태즉,만 2년을 셋집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당시 바울이 전도 여행을 멈추고 셋집에 머무른 것은 가택연금 상태로 로마에 구금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자 황제인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고, 판결을 위해 로마에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악질 범죄자가 아니었고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가택연금 상태로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행28:18-20).”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더크로스처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집에, 삶의 자리에, 부르심의 자리에 있습니다. 현재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유적지 전체는 최소 AD 400년대부터 AD 600년대 이내로 지어진 건물들의 잔재입니다. 다시 말해, AD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한 이후의 건물들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는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건물 안에 갇힌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만물을그의발아래에복종하게하시고그를만물위에교회의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2-23).” 교회는 만물에 충만한 것입니다. 1세기 교회는 시작부터가 흩어지는 교회 형태였습니다. 태생적으로 집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부르심의 자리에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셋집에머물며그곳이교회가되게하고하나님나라를전파한것과같이, 우리도 집이, 일터가, 부르심의 자리가 교회가 되게 합시다.

둘째, 교회는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온이태를자기셋집에머물면서자기에게오는사람을다 영접하고.” 초대교회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1세기 신분제도와 사회관습과 문화를 거슬러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문화로 이 땅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주인과노예가같은상에서떡을떼고서로입맞추며 문안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등 당시 여성들이 교회의 중요한 리더십들 중 하나였고 특히, 여성사역자들은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살피는 일을 하였습니다. 1세기 교회 성도들은 신분과 지위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살아갔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 우리는 ‘가족’에 대한 한국적 정서의 컨셉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하는 가족 개념을 붙잡아야 합니다. 알렌 크라이더 교수는 그의 책 『초대교회에 길을 묻다』에서, 초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정식 멤버가 되기까지 최소 3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는 신분과 인종,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되, 분명히 거듭난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정신이 무너진 것은 기독교가 국교화가 된 이후 입니다. 알렌 크라이더 교수는 AD 313년 전 초기 기독교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4세기 초 기독교가 국교화가 된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유리’한 것이 되었고, 4세기 말에 이르러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강제’로 변화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되 분명히 거듭나게 하는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거두어지고 제도가 되고 시스템이 되자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논함에 있어,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되 그들을 성령으로 보내심 받은 사도적 제자로 세워가야 한다는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인본주의나 사제주의가 아니라 만인제사장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성도들을 회복하되, 그들이 복음서의 제자들이 아닌 사도행전의 제자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올 수 있는 더크로스처치이면서 동시에, 아무나 더크로스처치 등록교인 될 수 없는 구별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 바울이 온 이태를 셋집에 머물며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즉, 선포하였다는 것과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포를 뜻하는 ‘케리그마’와 양육을 통한 가르침인 ‘디다케’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와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치외법권적으로 작동됩니다. 바벨론 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만져지고, 경험되는 것의 중요한 핵심이 바로 ‘예배’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알렌 크라이더 교수는 위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초대교회의 예배가 교회 성장에 극히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그들을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고, 그런 면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는 외부인들에게 선교적인 매력이 있었었습니다. 예배가 선교로 이어졌고 예배가 증인을 만들었습니다.” 1세기 교인들은 예배를 통해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계속해서 경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인 화살이 교회인 활대와 만나 쏘아질 때 드러납니다. 더크로스처치라는 활대로 쏘아지는 화살이 되어, 어둠을 깨뜨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 선포되고 교회가 개척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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