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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거하는 기름부음 (요일 2:27)

성경 속 기름부음의 용례

성경에서 ‘기름부음’은 다양한 용례로 사용됩니다. 먼저는 ‘권위’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나라의 지도자들인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먼저 기름부었습니다. 이 세 직분은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그 직임이 선포되었습니다. 두 번째 용례는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실 때 삼손은 천명의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기름부음 안에서 다윗이 수금을 타자 사울 왕을 괴롭히던 악신이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름부음은 거룩히 구별된 물건, 즉 성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서에는 하나님의 성막 안에 들어가는 물품에 관유 기름을 붓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성물은 동일한 물건일지라도 성별되어진 것이고, 그런 성물만 성막에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기름부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 하나님!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소원합니다.


주께 받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 안에 심겨지고 작동되기 시작했습니까? “믿음의 주요(믿음의 창시자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믿음이 우리 안에서 저절로 작동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영생의 믿음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을 주시며,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내 모습과 삶에 대한 질문들이 자기 행위와 자기 공로로 이어지게 되고, 과연 나는 구원받았는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오직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나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성령님은 하나님의 교훈과 훈련을 거부하려는 내면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율례를 따라 사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동행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성령님은 구원의 믿음을 주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여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인격체 이십니다. 성령님과 연결됩시다. 관계는 이론과 논리로 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고자 할 때 관계가 깊어집니다. 나의 진로, 나의 사명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독대할 수 있는 시간을 사수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성령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내 속마음을 성령께서 조명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내 언행 속에 숨어있던 마음의 중심, 내 습관의 동기 등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숨은 뿌리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는 발견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심령의 깊은 일들을 성령께서 드러내시고 보게 하시고 회복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꺼이 성령님께 우리를 내어드리며 계속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초대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로 사역의 자리에서뿐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조차 성령께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가르쳐 주실 때가 있습니다. 성령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들을 붙잡고, 그 말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우고 사랑하고 사역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성령님은 당신의 권능을 확연히 부어주십니다. 복음을 증거할 말들을 알려주실 뿐 아니라 때로는 예언의 능력으로 때로는 치유의 능력으로 우리가 주님과 동역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말한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때, 초기 영지주의가 발현되었습니다. 그들은 영과 육을 나누어, 구원은 영에 속한 일이니 육의 범죄는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영지주의(세린투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으로 죽었으니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런 적그리스도적인 가르침이 1세기 성도들을 혼란하게 했고, 요한은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경계했습니다. 이 시대,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때처럼 많은 미혹의 말들이 들려옵니다. 진리를 사수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길 날마다 기도합시다.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우리를 진리안에 자유케 하십니다. 죄에 넘어지는 우리 안에 예수를 드러내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은 율법을 떠나, 하나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의 중심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께서 사랑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받으시는 사랑의 표현이 순종입니다. 복음서에서 신명기의 첫계명을 인용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첫계명을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과의 연합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며 주님과 하나되는 연합을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아가서 5장의 여정처럼 성숙한 신부로 이끄시는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면, 회개와 자백의 삶을 회복하시길 축복합니다. 내 방법, 내 방식이 아닌 주께서 가르치신대로 순종하며 주 안에 거할 때 우리를 사로잡는 사랑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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