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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대상 13:9-14)


대전환기

오늘 본문은 사울의 왕조가 끝나고 다윗의 왕조가 들어서며 사회적, 정치적, 영적인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대전환기의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워진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오던 중 제사장 웃사가 참혹하게 죽고, 그로인해 법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진 일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영적 전환기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환기의 때, 웃사처럼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오벧에돔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자도 있고, 다윗처럼 말씀과 진리로 깨어나는 자가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이 출범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영성은 제하시고 어떤 영성은 일으켜 세우시며 위대한 예배의 시작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타작마당 – 마지막 때 영적 전쟁

다윗의 장막이 시작되면서 일어나는 본문의 사건 속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키워드는 ‘타작마당’입니다. 타작마당은 성경 전체에서 ‘대추수’, ‘심판’, ‘마지막 때’ 혹은 ‘영적 전쟁의 때’를 상징합니다. 본문은 법궤를 싣고 수레를 끌고 오던 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 것이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연출하신 시점이자 장소입니다. 헌신과 제물을 상징하는 소가 타작마당에 이르러 뛰었다는 것은 마지막 때 일어날 예배의 혁명, 예배의 충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 우리는 강력한 기도와 예배의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힌두교와 이슬람은 그들의 극단적인 예배와 기도를 무기삼아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와서 드리는 예배로는 이 치열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기도와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때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기도의 집 운동으로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 기도의 집 운동은 기도를 좋아하는 몇몇 그룹의 사역이나 프로그램이 아닌, 마지막 때 교회의 모습이자 교회가 선교할 방법입니다. 주님은 예배와 기도로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며 대적과 싸우는 교회들을 세우시고 대추수를 감당하도록 사용하실 것입니다.

웃사의 죽음 – 교회가 신부로 단장되기 위한 전제

마지막 때 교회가 신부로 단장되기 위한 절대적 전제에 제사장 '웃사의 죽음'이 있습니다. 웃사는 타작마당에 이른 소들이 뛰면서 법궤가 흔들리자 손을 펴서 법궤를 붙들었고 이 행동으로 인해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웃사가 무엇을 그토록 잘못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여호와의 법궤를 움직여야 할 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수레에 싣고 소가 끌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신상을 움직일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방인의 방법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오던 제사장 웃사는 타작마당에 이르러 법궤가 흔들리자 또 다시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고자 손을 뻗어 붙들은 것입니다. 웃사에게 하나님의 법궤는 신성을 잃은 궤짝이었습니다. 웃사의 이런 모습은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인본주의는 세속주의로 흘러가게 되고 신앙을 종교화 시키면서 종국적으로 교회가 신부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며 세상은 변화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믿음으로 사는 삶을 고수해야 합니다. 믿음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면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전에서 사는 삶,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때로 병을 치유하시고 막힌 길을 여실 때 뿐 아니라 모든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길 축복합니다. 믿음을 종교화시키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적인 가치들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고 어느 새 삶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봅시다. 주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위해 여호와의 법궤를 궤짝 취급했던 웃사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오벧에돔 – 하나님의 택하심

세 번째 키워드는 ‘오벧에돔’입니다. 오벧에돔은 ‘에돔의 종’, ‘에돔의 신을 섬기다’란 의미로 그 이름처럼 블레셋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용병이었고, 다윗의 삶을 가까운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모세의 수종을 들던 여호수아가 가장 가까이서 모세의 삶을 보았던 것처럼, 오벧에돔도 다윗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며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했는지 그 곁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오벧에돔이 어떻게 법궤를 맡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그 대신’ 오벧에돔이 메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이를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치우쳐’라고 표현합니다. 이 번역은 원문에 보다 가까운 뜻으로, ‘미끄러져’, ‘쓰러져’란 의미입니다. 즉, 오벧에돔이 법궤를 잡은 것이 아니라, 법궤가 오벧에돔을 택한 것입니다. 소가 날뛰며 흔들리던 법궤를 붙들은 웃사는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제사장이 찢겨 죽은 난리 통에 법궤는 오벧에돔에게 ‘쓰러져 갔고’, 다윗은 그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자 그대로 법궤를 메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치 식구처럼 법궤를 집 안에 들이고 모신 오벧에돔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소문이 다윗을 깨웁니다. 다윗은 법궤를 맡아간 오벧에돔을 시기하게 되고, 법궤를 움직이는 모세의 식양을 기억해내어 말씀의 삶을 회복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되는 일.” 바로, 마지막 때 대추수를 이루며 우리가 볼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이 교회가 열방에 기도의 집을 세우는 일을 섬기는 것은 이러한 회복을 위함입니다. 우리는 온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며 동시에 영적 땅 끝인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회복되기 위해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마지막 때 승리하는 공동체

마지막 때 우리는 웃사의 영성을 죽이고 오벧에돔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다윗들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한 개인으로는 마지막 때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다니엘에게도 기도하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와 함께하는 무리가 있었고, 사울도 제자들을 일으키며 함께 사역했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 안에 서로를 품고 믿음을 지켜내도록 헌신한 목자들을 세워주고 계십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영적 가족으로서 부르심을 함께 이루어 갑시다. 알파의 때처럼 오메가의 때가 올 때, 1세기 교회의 신앙을 살아내는 교회가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