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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통과의례

마 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통과의례

통과의례는 결혼, 졸업, 입사 등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여 겪어야 하는 과정과 의식을 말합니다. 간단하든 길고 복잡하든, 주어진 통과의례를 거쳐가야 우리는 그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그들은 새 족장, 대추장이 세워지기 위해 반드시 한 가지 통과의례를 거치게 하는데, 새롭게 대추장으로 지명된 사람이 홀로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 사자를 잡아 가죽을 벗겨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통과의례에 실패하면 그는 새 족장으로서 마을을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속에서 대추장으로 지명받았다 할지라도, 그 자격 검증 과정에서 무효화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광야의 시험은 마치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삶을 시작하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된 3장의 침례식을 지나,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같은 통과의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통과의례의 장소, 광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훈련하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침례식 후, 주님이 향하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왕의 대관식처럼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하늘과 땅을 울리는 소리로 선포된 후, 마지막 통과의례의 장소인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광야가 그저 황폐하고 버려진 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광야는 신앙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특별한 곳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의 삶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 위한 통과의례의 장소이자 시간인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미드바르, 네게브, 아라바, 예쉬몬 등 7개의 단어로 광야를 표현할 수 있는데, 이처럼 광야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누군가에게는 높은 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동굴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평야이거나 누군가에게는 모래 언덕이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과 형태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로 우리를 세우기 위해 광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생생히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훈련하고 사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광야도 생지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광야도 사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열매가 없고 고독한 땅을 지나가고 있을지라도 주님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광야가 마침내 승리로 마칠 통과의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멀어지고만 있다면, 광야가 사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즉시 일어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광야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과의례를 완수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이 시간을 살아낼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감당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광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 하나님 –하나님을 주목하라

오늘 본문에서 또한 주목할 점은 광야의 통과의례를 진행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모두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다고 했으며, 마가복음은 좀 더 거칠게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종종 광야의 시즌을 지나가는 성도 중에, 이런 인생의 때가 온 것이 오로지 마귀의 탓이라고 여기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 보다 마귀의 일에 더 주목하고 상황과 주변인들을 원망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가 성도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교구 도구 쯤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열방과 우주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버려져야 할 것들이 버려지고, 채워져야 할 것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잘 통과하여 승리한 대표적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그를 질투하는 형제들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 속에서 요셉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광야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고백합니다. 나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준 그 누군가를 원망하며 인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주님을 따라감으로 광야를 지나 승리하는 자로 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사자와의 싸움 –십자가로 나의 자아를 이기라

앞서, 족장이 되기 위해 우두머리 사자를 찾아 죽이고 그 가죽을 가져와야 하는 한 부족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광야라는 통과의례를 지나갈 때 반드시 대면하여 처리해야 할 사자는 무엇일까요? 광야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다름아닌 ‘나 자신’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삶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광야는 ‘내가 죽는 것’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고백해야하는 신앙의 본질이자 삶의 방식이며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할 때, 질그릇 같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삶을 살아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쉽게, 그리고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죽은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어느 새 내 기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처럼 다혈질적인 사람보다 온화한 사람에게 더 힘든 싸움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나, 마치 죽은 것처럼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저항하는 나를 반드시 이기길 축원합니다. 내 논리도, 감정도, 의지도, 자존심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때로 내 경험과 판단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아도, 내 성향에 맞지 않고 취향이 아니더라도, 주께서 말씀하시면 행하는 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내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주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가득 담읍시다. 그 생명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며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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