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불로

2020-5-10

마태복음 3:11~12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계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 

   

성령과 불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의 사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침례 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위해 존재했던 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 때도,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목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의 침례를 자신의 물 침례와는 차원이 다른 ‘성령과 불의 침례’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불의 침례는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신학자들은 본문의 성령과 불을 구별합니다. 앞의 ‘성령’이 죄인을 가려내는 일, 곧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으고 쭉정이는 날리는 바람같은 사역이라면 뒤의 ‘불’은 그렇게 모아진 쭉정이들을 불에 태우는 둘째 사망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과 불을 하나의 의미, 같은 표현으로 여깁니다. 저 역시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함에 있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불’없이 ‘성령’으로만 예수님의 침례를 표현했다면, 성령과 불이 같은 뜻을 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님은 죄의 문제에만 관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삶에 전인격적으로 참여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11절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심을, 이어지는 12절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침례 요한이 기다린 예수님의 사역 –첫째, 영적 침례

누구도 본 적 없는 열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모세, 이세벨에 맞서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을 내린 엘리야처럼 구약의 역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흘러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 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그러나 침례 요한은 자신을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는 이방 노예같은 존재로 비유하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밝힙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위대한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성령과 불의 침례는 요한이 주었던 물 침례, 즉 물리적 차원을 넘어 영적 세계를 여는 침례였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동기를 불어 넣었다면, 예수님은 그러한 감동과 감격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 신령한 차원, 하나님 나라 차원의 사역’을 우리 삶에 여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를 적시고 덮는 자연 세계의 물 침례가 아닌, 불과 성령으로 베풀어지는 침례를 통해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바라고 준비하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도를 닦고 마음과 정신을 수양하는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 너머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나라에 우리가 속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는 주님의 나라를 갈망합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며 누리는 자 되길 축복합니다. 

 

침례 요한이 기다린 예수님의 사역 –둘째, 새 창조의 생명

두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과 불의 침례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완전한 중생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침례 요한이 행한 물 침례는 율법이 갖는 한계, 즉 구약 사역의 한계에 닿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존재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이끄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광야의 외침이 들릴 때 회개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받기도 하고, 차가운 물이 머리를 덮을 때면 감동과 감격에 젖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종교의식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또 연약한 자인지 나의 한계를 보게 하고, 그래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와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통로는 되겠지만, 우리를 이전과 다른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성령과 불 침례 안에 있는 생명에 있습니다. 요한은 이 위대한 일을 말한 것입니다. “내 사역은 회개를 여는 것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너희를 완전히 변화시킬 거야. 죄의 기질과 정욕을 불과 성령으로 소멸하시고 새로운 성품이 너희 안에 심겨지게 할 거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일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이 악물고 참고 애쓰거나 그럴듯하게 가리고 감추지 않아도, 성령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변화되게 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과 불의 사역이 일어나야, 진정 거듭난 자입니다. 

 

침례 요한이 기다린 예수님의 사역 –셋째, 약속하신 성령의 부으심

세 번째,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령의 부으심이란 위대한 약속을 성취하는 분이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은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침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이 두가지 사역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32절에 이르러,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 “또 증언하여 이르되...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가도록 중보하십니다. 성령님 없이,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 없이, 우리 안에 생명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 죄에서 자유케 하고 죄를 이기게 하시는 분,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성격과 기질도 변화시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갈망하는 교회되길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날마다 씨름하고 싸울 수 있는 성도되길 축복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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