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서 행하라2
에배소서 5:11~14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빛으로 행하는 성도와 어둠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셔서, 진노의 자녀들의 자리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는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바울은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안에서 가르치며 당부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았으나, 여전히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인내하시고 기다려 주시지만,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어둠의 일을 하는 자리에 거한다면 그들에게 공의의 심판이 내려질 때 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에 땅에 거하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임하는 어둠의 자리에서 벗어나, 빛 안에 거하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빛으로 행하는 자 –어둠을 책망하여 회개케 하는 자
오늘 에베소서 본문은 빛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빛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는 어둠과 구별되어 어둠을 드러낼 뿐 아니라, 어둠을 책망하는 자들입니다. 어둠의 일들을 버리고 참여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어둠을 꾸짖는 자들인 것입니다. 본문의 ‘책망하다’의 헬라어는 ‘노출하다’, ‘꾸짖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유죄를 선고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둠에 대해 자연스럽게 행하는 반응이, 어둠을 드러내고 폭로하며 꾸짖는 것입니다. 즉, 빛의 일은 “죄를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소나 정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치 파파라치처럼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그의 약점을 사람들에게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받으라 말한 바울이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는지를 말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우리는 용납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내하시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죄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 관용’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모든 수치를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어둠의 일들을 은근슬쩍 관용시키고 흐리멍텅하게 만들어서 무엇이 죄인지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은 혼미함일 뿐입니다. 이런 거짓이 죄를 가중시키고 어둠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빛은 어둠을 어둠되게 하며 어둠을 책망합니다. 이는 죄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주님의 심판에서 진정 구원받을 길, 십자가로 나아오도록 빛을 비춥니다. 빛 안에 거하며, 어둠의 일들을 함께 끊어내길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말씀처럼 빛 안에서 죄가 죄됨으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속한 빛은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생명의 길을 보이며, 죄와 그로인한 어둠의 저주들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정죄와 참소가 아닌, 빛으로 서로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과 빛 안에서 죄를 고백할 때, 삶을 옭아매고 있던 죄의 결박들이 끊어질 것입니다.
어둠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의 상태 –‘잠자는 자여’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어둠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자리에 거하는 성도들의 모습과 상태에 대해 본문은 ‘잠자는 자’라 말합니다. 이들은 죽은 자는 아니나,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영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들은 빛으로 어둠을 책망하지 못할뿐더러, 어둠에 거하게 됩니다. 식물인간처럼, 생명은 유지되고 있으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할 반응과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의 상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런 자들은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 받았으나, 삶의 방식과 태도가 살아있는 자인지 죽은 자인지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똑같이 즐기면서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 살아가지 않길 바랍니다. 진정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가치들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열심히 달려가는 이유와 목적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소통하고 일하면서 그들과 시간을 보내지만, 영광을 본 우리의 삶의 가치가 그들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옷타령, 차타령, 집타령 하는 죽은 자들사이에서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죽은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합시다. 우리가 빛으로 행할 때 죽은 자들이 “너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너의 삶에 빛이 난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자리에서 돌이킬 것입니다.
어둠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의 상태 –‘일어나라’
나도 모르게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의 또 다른 특징은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렸음을 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이 사는 일에 흥미도 없고, 대가를 지불할 마음도 없습니다. 말씀과 예배의 자리보다 휴식이 간절할 뿐입니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일으키길 바랍니다. 계속해서 영의 일들을 향한 갈망과 열정이 부어지길 바랍니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지내다보면, 죽은 자들의 삶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빛으로 부름받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가만히 스며든 세상의 문화에 삶의 기준이 조종되면서, 영적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영원한 소망이 희미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집니다. 이러한 때, 영과 몸을 깨워 기도의 자리로 가길 바랍니다. 육의 몸이 쳐지기도 하고 영적으로 눌리며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고 싶을 때, 기도와 예배의 자리에 서서 주님을 부릅시다. 우리는 산 자들입니다. 세상은 알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소망과 기쁨으로 오늘도 충만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