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사무엘하 6:20~23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내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없으니라
예배자 다윗
다윗은 예배자 불리는 왕입니다. 그는 목동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을 노래했고, 다윗의 많은 찬양들이 시편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사랑할 뿐 아니라 예배가 삶이었고 예배에 대한 계시가 있었던 다윗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상의 예배 모형을 땅으로 옮겨와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리가 이스라엘에 울려퍼지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베 에봇이 몸을 온전히 가리지 못할만큼 춤추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궁으로 메어 오며 기뻐하는 다윗은 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며 예배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충돌
본문의 사건 이면에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충돌이 있습니다. 이는 사울과 다윗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합니다. 사울이 실패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말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머무르며 기도하는 것에 관심도 없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여호와는 문제가 발생할 때 해결책을 받아오는 ‘누군가의 하나님’ 정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미갈은 아버지 사울처럼,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마침내 옮겨오는 다윗의 기쁨이 미갈의 눈에는 천박해 보여습니다. 미갈에게는 다윗이 예배하는 모습이 왕으로 지녀야 할 위엄을 전혀 갖추지 못한 목동 출신 남자의 저급한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보자마자 미갈은 비꼬면서 말합니다. “내가 오늘 왕이 아니라 부랑자를 본 듯 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누구를 향하여 초점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갈리는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기준입니까? 하나님이 동기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동기입니까? 특별히 이 강남 땅에서 우리는 인본주의적 가치들과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 같지만,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면서 이리 저리 쓸려 다니기에 바쁜 땅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감성에 맞는 노래, 내가 흥이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똑같은 노래도 공연이 될 수 있고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만족케하고 나를 즐겁게 하는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시간의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사울처럼 성장한 미갈과 다윗의 충돌처럼,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충돌할 때 반드시 승리하길 축원합니다. 인본주의는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가져오고 세속주의를 열어 둡니다. 결국에 하나님의 소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목전에 서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살아갑시다.
나의 수치와 연약함을 뛰어넘는 겸손
본문에서 보여지는 다윗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또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의 태도는 예배자의 출발점이기도 여호와의 궤를 장막으로 옮긴후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백성들을 돌려보내며 가족들을 축복하기 위해 돌아온 다윗을 보고, 미갈은 대뜸 다윗의 예배를 조소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건달패들처럼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셨으니,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은 이러한 빈정거림에 즉시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였다고 받아치며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로 나를 세워 주셨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여자들은 나를 더욱 존경할 것이오.” 극단적인 예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한가지는 ‘내가 망가질 수 있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예배’를 거절하는 이유로, 나의 위치나 포지션을 핑계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전심으로 예배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의 뿌리에 ‘열등 의식’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이 동기가 되어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자들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사실, 다윗은 열등의식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에게 기름 붓기 위해 다윗의 집을 찾아갔던 때를 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그의 아들들을 사무엘 앞에 데려오면서 다윗만은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를 보고, 다윗이 율법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을만한 자격이되지 않는 출생이었을거라 예측합니다. 다윗은 부정한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윗을 향한 형들의 태도도 ‘무시’로 일관되었습니다. 다윗 스스로도 시편 곳곳에서 자신을 ‘고아’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은 겸손해 집니다. 다윗은 자신의 컴플렉스와 열등의식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섭니다. 원수의 수없는 참소를 뒤로하고, 스스로 낮아질 것을 선택함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상한 심령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오늘 이 교회 안에 주님을 예배하기에 망가질수 있는 자들이 서길 축원합니다. 사람들의 말과 눈길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 안에서 자유합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태도에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몰입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 코람데오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춤은 이러한 몰입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춤은 임재의 황홀경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깊은 임재안에서 찬양과 외침을 넘어, 때로 춤으로 주님을 높여드리기도 합니다. 다윗의 춤은 그러한 황홀경에 사로잡힌 영적 사건입니다. 당시 다윗이 입었던 에봇은 그가 스스로 인지 못할 정도의 편안한 차림이 아니었습니다. 둘러맨 에봇이 느슨해지고 몸이 드러났음에도 다윗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나누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예배를 꿈꿉니다. 익숙했던 예배 순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영이 이끌어가시는 예배의 순간이 오길 기도합니다. 인지 기능이 멈추어질만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예배가 풀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예술은 이러한 예배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모든 악기와 그림과 춤이 예배로 구속받아 드려져야 합니다. 특별히 성령에 붙들린 몸짓, 신령한 춤이 이 교회안에도 풀어지길 바랍니다. 청각과 시각과 후각 등 우리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예배하는 자들이 서길 바랍니다. 문둥병을 가린 나아만의 갑옷을 벗어버립시다. 우리의 약점과 수치를 억지로 가린 옷을 벗어버리고,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예배합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안에서,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