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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와 선지자의 터3

에베소서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와 모퉁잇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교회는 완전해질 것입니다. 신랑되신 주님은 신부된 교회로 그 완전한 연합의 날을 맞이하도록, 친히 단장해주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장 본문은 이 완전한 약속의 날이 오기까지, 어떻게 교회가 온전해지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새 사람’의 섭리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예수께서 모퉁잇돌 된 성전’의 비밀은 주께 속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게 합니다. 지난 시간 나누었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다시 정리해 봅니다. 교회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한 자들이 해산의 수고로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자들을 낳아 한 몸 되어가는 유기체적 생명 공동체입니다. 부르심과 순종, 그로 인해 주님께 접붙여진 자들, 그리고 그들과 주 안에서 하나되는 생명의 유기체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교회의 신비입니다. 이 비밀을 모퉁잇돌의 의미로 다시 되짚어 봅니다. 모퉁잇돌의 첫 번째 뜻은 ‘기준’, ‘연결의 기초’, ‘시작’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터를 닦은 후에 모퉁잇돌을 세움으로 건물들을 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터 위에 놓인 모퉁잇돌의 종류와 형태에 따라, 이어지는 건축물의 양식과 구조가 결정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사건이 될 때, 비로소 교회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행정적 등록카드를 교회에 제출하고 각종 행사와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는 교회란 유기체와 연결된 자가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선포되었음을 기억합시다. 교회의 시작도, 기준도, 예수님이십니다. 모퉁잇돌의 두 번째 의미는 ‘소유’, 혹은 ‘소유자’에 있습니다. 종종, 의미있는 건물 주변에 어떤 이름이 새겨진 돌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는 모퉁잇돌의 의미를 담은 조형물입니다. 건축을 시작하는 주인들은 자신이 기념하고자 하는 이름을 모퉁잇돌에 새기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모퉁잇돌 되심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말합니다. 교회는 내가 하고 싶은 사역과, 내가 꿈꾸던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역사들을 교회로 이루어 가도록 결정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뜻하신 일들을 품게 됩니다. 그러한 교회들이 순종으로 나아갈 때, 교회를 소유하신 주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전이 되어감과 처소로 함께 지어져감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은 앞서 나눈 20절의 내용들을 또 달리 표현함으로 온전한 교회로 서기 위한 요소들과 그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주 안에서 성전으로 되어가며, 또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때, ‘성전’이라는 건축물과 ‘처소’라는 공간은 앞서 나누었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와 ‘모퉁잇돌’의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두 요소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21절의 ’되어 가고‘와 22절의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입니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력 -‘성전이 되어 가고’ 교회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1세기의 교회처럼 주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웅장한 음악과 근사한 조명으로 연출해내는 분위기가 아닌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하며 끊임없이 퍼나를 수 있습니까? 북한의 교회들을 생각해 봅니다. 1907년 평양에 임했던 부흥은 한 도시 전체를 바꾸어 놓으며 퍼져나갔고, 이후 북한의 많은 거주민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북한에 주체사상과 공산주의 이념을 앞세운 무장세력이 들어서자, 그리스도인들은 한순간 정치범 수용소란 곳에 갇히게 됩니다. 성경을 감추어 두고 읽은 자들 뿐 아니라 성경 이야기를 잠시 듣기만 한 사람들도 모두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들은 그곳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든 핍박과 박해 가운데도, 복음은 그 곳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사상에 더럽혀진 머리를 박살내어야 한다며 갖은 협박과 고문을 가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의 순교는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성경이 유통되어 갔고, 더 많은 자들이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도 가로막지 못하는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되어 가고’는 교회의 이러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아욱사노’라는 헬라어는 ‘자라다’란 뜻으로, 생명력을 지닌 성장, 확장을 의미합니다. 주목할 것은 이 단어가 현재 시제로 사용된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생명력은 성장으로 흘러나갑니다. 거듭난 자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생명이 성장을 멈추고 화석같이 굳어져 종교인이 될 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슬람 국가와 북한의 지하 교회의 생명력이 결코 멈추지 않듯, 우리의 생명도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생명으로 풍성한 교회를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로 함께 성장하는 신비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두 번째 단어는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입니다. 이는 ‘스노이코도메오’란 단어로, 역시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수동형으로 사용된 점입니다.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갈 때, 이 성장은 지속적인 움직임이면서도 스스로 그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령께서 도우셔야 함을 말합니다. 교회를 자라게 하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성장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주님을 의지함에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자라나는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만큼,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20절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교회가 세워짐과 연결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통로로 영적 아비와 어미가 되어 교회의 질서를 권위로 지킬 종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터를 닦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길을 걸어가고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께서 말씀하신 질서와 정렬에 또한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익명성을 요구하며 말씀을 골라 듣고, 삶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터위에 세워진 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작은 진동에도 쉽게 흔들리고 빠져나가는 돌 같아서, 생명의 열매를 함께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어디에서 역사하시며, 어떻게 그 생명을 공급받을수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기억합시다. 몸을 이룰 때, 우리는 절로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여, 생명을 공급받음에 막힘이 없길 축원합니다. 공동체의 비전과 공동체의 사역과 공동체의 움직임에 내 삶이 함께 가고 있습니까?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자라나게 합니다. 부르심을 함께 이루어 나가며 교회 위에 부어진 생명으로 언제나 충만하길 기도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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