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밝히사 4

에베소서 1: 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상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소망, 부르심의 삶>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은 우리가 가진 영원한 소망에 대해 세상이 물을 때 대답할 것을 준비해두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야 낙오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진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기꺼이 드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킬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기반에, 구원이 있습니다. 세상은 갖지 못한, 그렇기에 알고 싶어하는 구원과 그 소망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나요? 먼저, 구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오면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은 영원한 고통의 대상으로가 아닌,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 주와 함께함을 말합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답할 소망, 구원의 마지막 의미입니다. 구원은 부르심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구원을 하나님 나라의 문지방을 넘는 것이라 표현해 왔습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가 오늘도 이 땅에서 그의 나라로 서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여정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며,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에게 주어진 부르심의 삶을 살아내며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왜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지 물어오는 세상에게, 당당하고 힘있게 우리가 가진 소망을 말하는 자들이 됩시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여 하나님 앞에서 선명해지는 부르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르심을 알며 또한 부르심을 따라 전진할 수 있을까요? 부르심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기억할 첫 번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나를 향한 그의 마음과 뜻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부르심을 고민하며 상담에 의지하는 성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예언 기도를 받으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은 한두 번의 특별한 체험이나 상담을 통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부르심은 창세 전에 나를 계획하신 주님을 만날 때 드러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의 모세를 봅시다. 그는 80세에 떨기나무에 임한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왕족의 권세를 잃고 젊음도 다 흘러가 버렸을지언정 여호와 앞에서 부르심이 비추어지자, 그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불러내는 영도자로 서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엎드려 고백할 때, 사람을 취하는 자로의 삶, 새로운 부르심의 삶이 선포됩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주의 빛 앞에서, 신념과 야망이 아닌 부르심이 드러납니다. 내가 세운 뜻과 야심과 소신은, 시대와 환경이 변하고 기대했던 바가 어그러지면 사라지거나 대체됩니다. 그러나 부르심은 모든 것이 끝나 보이는 상황에도 기도와 예배의 자리에만 나아가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임재의 자리에서 감출 수 없이 드러납니다. 오늘, 내가 머문 곳이 광야와 같이 느껴질 지라도 부르심의 자리라면 주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삶을 이끄시는 주의 빛 앞에서, 부르심을 발견하길 축원합니다.
<둘째, 은사와 기름부음으로 발견되고 이루어가는 부르심> 두 번째는 은사와 기름부음입니다. 보통, 은사는 고전12:4~10의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도구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의 28절 이후는 앞서 언급한 기능적 은사들이 아닌 직임적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그리스도의 몸의 원리를 말하는 에베소서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를 들면,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는 목사라는 직임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이 부르심을 감당하고 몸을 풍성케 할 다양한 기능적 은사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똑같이 목사라는 직임적 은사, 부르심을 받은 자들 중, 누군가는 지혜의 말씀이 탁월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병 고치는 능력이 탁월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기능적 은사와 직임적 은사가 중복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고린도전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이 말하듯, 몸 안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은사와 기름부음을 통해 부르심을 발견하고 살아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은 우리의 직임적 은사, 곧 부르심의 자리와 연결됩니다. 누군가는 가르침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상담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글을 쓰는 것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그가 하면 탁월함이 느껴지고 권위가 드러날 때, 기름부음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긍휼을 베푸는 자, 손 대접하는 자, 섬기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들을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과 다음세대를 살리기 위해 권위와 권세를 받고 섬기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물질을 운반하는 자들은 그런 은사를 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은사와 기름부음은 무엇입니까?
<셋째, 교회와 한 몸 되어 함께 이루어가는 부르심> 부르심을 발견하고 이루기 위해 취해야 할 세 번째는 공동체, 곧 교회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교회가 부르심의 공동체임을 나누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터져 나왔던 교회의 선포가 ‘에클레시아(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요한복음 15장을 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구원에 관함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매를 맺으시는지, ‘교회’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뿌리라면, 누군가는 기둥이고 누군가는 가지이고 누군가는 나뭇잎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광합성을 하고, 누군가는 잎을 피우며, 누군가는 영양분을 전달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교회 안에서 부르심을 확인하며 함께 이루어 갑시다. 고린도전서 12장이 말하듯, 누군가는 발이고 누군가는 귀이고, 누군가는 눈일 것이나, 우리 모두가 한 몸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이 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속에 있던 더크로스처치로 성취할 부르심에 저도 캐스팅 되었을 뿐입니다. 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 동일한 부르심을 위해 한 몸 된 자들임을 믿습니다.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가뭄을 견뎌야 하고 폭풍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한 몸 되어 우리가 연합할 때, 반드시 아버지의 열매들을 맺을 것을 믿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배나무는 배를 맺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풍성케 됨을 기억합시다. 예수님 곁에 머무르던 제자에서, 성령으로 보냄을 받는 사도적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만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