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 목숨 걸고 사수할 것 1
요한복음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장과 막14장에서 보는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사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은 위대한 예배와 임재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의 극단적 헌신이 물질적 드림을 넘어 특별한 은혜로 주어진 기회의 예배였으며, 그로 인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는지를 보게 합니다. 단순한 헌신을 넘어 우리가 드릴 예배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앞서 한 가지를 정리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요한복음 본문의 이 일이 마태복음26장과 마가복음14장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종종,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한 요한복음과 ‘머리’에 부었다고 한 마태복음, 마가복음의 차이점 때문에 성경과 이 사건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당시, 향유는 결혼을 위해 신부가 준비해야 하는 예물이었습니다. 혼인을 위해 신랑이 처소를 준비하듯, 신부는 향유를 준비해 두었다가 날이 이르면 봉해진 옥합을 열어 기름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했습니다. 그 전까지, 향유의 향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밀봉한 옥합의 마개는 한 번이라도 열린 후에는 전과 같은 상태로 향유를 보관할 수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깼다는 것은, 이 봉해진 마개를 열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처럼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옥합의 기름을 부었고, 한 근의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를 타고 발끝까지 흘렀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에서부터 부어진 기름이 발까지 흘렀고, 마리아는 그 발을 머리털로 닦은 것입니다.
잔치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 –예배를 받으시는 한 분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당신께 향유를 부은 일을 예배로 받으셨습니다. 기존의 종교적 상식을 뛰어넘어 어떤 제자도 행한 적 없는 이 극단적 헌신이, 주님의 눈에는 속옷이 흘러내리도록 뛰며 찬양한 다윗의 예배와 같았습니다. 이 위대한 예배가 우리의 예배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할 한 가지가 또한 있습니다. 2절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와 마리아와 죽음에서 회생한 나사로가 함께 모여 잔치를 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마르다는 잔치의 일들로 주님을 섬기고,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는 주와 함께 앉음으로 주님을 높이고,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모습은 서로 달랐으나,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드릴 바를 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예배도 항상, 주님을 위한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가 우리를 위해 벌어진 잔치로 착각하곤 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해, 또는 내가 은혜를 주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얼만큼의 감격과 은혜가 임하는가를 예배팀의 찬양과 설교에 의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오직 예배의 주인공 되신 주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무대에 선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중석에 선 교인들의 표정을 관찰하며 ‘지금 내 예배에 임재가 오고 있는가?’를 생각했다면, 그 예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가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드려지는 것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킵시다.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리하여 높임받기 합당한 한 분께서 찬양받으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일을 함으로, 나사로는 주님 곁에 함께 앉아있음으로, 마리아는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을 예배했듯, 우리가 드릴 모든 것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자 되길 축원합니다.
마리아가 드린 예배의 향, 임재 –우리가 사수해야 할 사명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극단적인 이 예배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되었는지 봅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옥합의 향유를 부음으로, 그 향이 집에 가득했다 합니다. 마리아의 예배는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듯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예배의 향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온 집을 가득 채운 향유의 향은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 자들의 옷에도 배어, 잠들기 까지도 이 일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임재입니다. 마리아의 특별한 예배는 특별한 임재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생애에는 내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한 섬김이 있는가 하면, 내 감정과 상황과 환경이 열린다 해도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섬김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붓자, 제자들은 마리아에게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말하며, 이를 비싼 값에 팔아 그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으리라 ‘분개’합니다. 구제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잔치는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 두 번 다시 드릴 수 없는 예배를 드리는 은혜의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이는 특별히 24/7 기도의 집으로 이 도시와 나라와 열방을 섬기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이 사역은 돈이 많거나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는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지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주간 미국과 영국의 교회들을 섬겼던 이번 사역을 통해, 저는 주야로 주님 한 분을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이 멈추지 않는 교회의 소리로 이 땅에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나르고 있음을 또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특별한 섬김의 은혜를 결코 빼앗기지 맙시다. 돈이 있다고, 사람이 많다고, 오지 않는 ‘주의 임재를 나르는 일’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우리 인생에도 이러한 은혜를 놓치는 일이 없길 축원합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특별한 순간, 주께서 영원히 기억하실 예배를 드리는 은혜 입은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