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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 목숨 걸고 사수할 것 2

요한복음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집 안을 가득 채운 향유의 향처럼, 주의 임재를 느끼고 경험합시다. 지난 시간, 우리는 마리아의 특별한 예배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에서, 마리아가 옥합을 가져와 밀봉된 그 마개를 열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던 마지막 잔치의 날, 마리아의 이 특별한 예배로 인해 집 안은 향유의 향으로 가득 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나,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이 향기가 바로 주님의 임재와 같습니다. 임재는 영 뿐 아니라 혼과 육을 가진 우리가 초월적이신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 임재의 장면들을 보이며, 또한 임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개역개정판이 등장하면서 살후1:9, 대상16:27, 유다서 1:24등과 같이, ‘임재’가 ‘영광’이나 ‘그’등의 표현 안에 함축되어 많은 부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임재는 성령으로 주를 따르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며, 사수해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구약 뿐 아니라 신약의 여러 저자들은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와 같은 구체적인 표현들로, 우리의 영을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해 모든 혼적, 육적 영역에도 임하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이 말하듯,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항상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또한, 우리로 당신을 느끼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언제든 죄를 질 준비가 되어있는 불완전한 육을 가진 우리가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오늘도 우리를 안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손을 잡아주시며 우리의 육체와 감정과 의지 영역에도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혼적 작용과의 분간의 기준에 영광이 있습니다.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육과 혼의 한계를 가진 우리가 당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가오시는 임재. 우리의 육체와 감정을 만지심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시는 이 임재는, 그렇기에 때로 감격이나 감동과 헷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콘서트장 무대에서부터 화려한 조명과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의지를 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작용들은 임재가 아닙니다. 중세 카톨릭 성당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종교의 옷에 가려지며, 반짝이는 스테인글라스의 화려함과 성직자들의 호화찬란한 옷차림과 웅장한 악기 소리들이 주님의 임재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했던 베드로의 선포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대신 은과 금만 남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헷갈림을 경계하여, 다양하고 깊은 감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육체와 혼을 통해 느끼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임재’라 표현하기 위해,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감정적 동요와 자극에 의한 거짓 임재에 속지 않길 축원합니다. 거짓 임재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감격스럽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더 곤고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