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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22 <근원적 세가지 필요>

마태복음 6:11-13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되길 원합니다.>

“나는 유럽 전역의 모든 군대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두렵다.” 피의 여왕이라 불렸던 영국의 메리 여왕은 중병으로 죽어가며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조국이 구원받지 못할 바에 목숨을 거두어 달라 간구하였던 ‘기도하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만큼의 영향력과 능력이 있는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을 맬 수도, 풀 수도 있는 우리의 기도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자,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특별히 이 교회에는 그러한 기도의 기름부으심과 또한 그를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주 EGS 예배 때 무거운 영적 공기 가운데, 주님은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 이 교회의 기도가 우리만 누릴 수 있는 임재를 위한 것임이 아니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명의 청년 시절 데이빗 차 선교사가 이 교회에 몸을 이루며 들었던 주님의 음성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멈추지 않고 뛰는 심장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체의 어떤 부분보다 작을지언정 심장은 생명의 시작이며, 생명의 유지를 위해 쉬지 않고 뛰는 생명 그 자체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끊이지 않는 기도의 불이 오늘도 이 곳에서 타오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를 덮고 있는 이 임재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와 예배가 멈추지 않도록 세우시고 기름부으신 주님의 뜻을 따라,그를 이루어 드리기까지 오늘도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길 축원합니다.

<주께서 구하신 일용할 양식은 영적 양식이며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은 지난 20주 가까이 우리가 나누고 있는 산상수훈의 주님의 기도 전체를 압축한 선포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하신 본문 6:9~10은 6:33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어지는 6:11~13은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6:33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의 문제와 시험과 악에서 건져지길 구하는 간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절로 더해지는 것으로, 진정한 기도의 목적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를 간구하신 주님의 마음과 그 의미를 우리가 또한 나눌 때,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기도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 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해당되는 11~13절의 간구는 근원적 세가지 필요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본문이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임을 상기합시다. ‘이 모든 것들’ 중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매일 주어졌던 양식, 바로 ‘만나’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깟씨 같이 희고 꿀 섞은 과자와 같던 만나는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진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명기 8장과, 이를 인용하여 주께서 다시 선포하신 마4:4 말씀과 같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 주어진 양식이란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의 기도가 이방인과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와 달라야 함을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육체의 필요만을 위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십니다.영으로 사는 존재인 우리의 매일의 필요, 영이 먹을 양식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구하신 일용할 양식이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를 위함이라면, 또 한편으로는 육을 가진 우리의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르심으로, 하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나의 필요를 넘어서 우리의 필요함을 기도하십니다. 오늘 이 공동체에 먹고 사는 실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지체가 있다면, 그를 발견하여 돕지 않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되어 ‘우리’안에서 삶을 함께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썩어질 만나를 쟁여놓는 것도 불순종이지만, 최소한의 필요를 구하는 자들이 우리 안에서 채움 받지 못하고 있다면,그 역시 하늘 공동체의 불순종이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은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 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간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다시 고백하게 하며 일깨우게 하는 기도 되어 질 것입니다.먼저는 우리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감사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감사의 고백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감사한 상황에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내 발등에 돌이 떨어졌을지라도 여전히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의 일하심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을 때, 모든 상황 가운데 하늘의 평강을 이루어 내는 진정한 감사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삶의 모든 필요들이 한 번에 다 채워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 한 번으로 삶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기를 간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침 이슬과 함께 매일같이 이스라엘 위에 내려졌던 만나는 쌓아둘 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매일 주 앞에 나아오며, 우리를 먹이는 한 분이 다른 이가 아닌 하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매일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 삶의 주관자, 우리의 공급자가 주님이심을 고백할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으로 원수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가 우리 위에 충만 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은 영원의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간구는 또한 영원의 삶을 살라는 주님의 도전이며, 이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의 갈망과 그를 구하게 하는 기도가 됩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았으나 잠시 이 땅에 내려온 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기 전 거쳐 가는 곳임을 기억합시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보여지는 것들로 인한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미국 내 기독 실업인들의 모임인 미국 CBMC의 강사로 초청되었던 이동원 목사님의 간증을 나눕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마중나오기로 한 미국 CBMC 회장님을 찾던 이동원 목사님은 그와 같이 보이는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챙이 닳은 모자를 쓴 한 사람이 다가와 이동원 목사님에게 말을 걸고 나서야, 이목사님은 비로소 그가 마중나온 회장님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백성인 것과 하늘의 가족됨으로 인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잠시 보여지는 모습은 영원한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안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자랑되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 나라로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시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나아갈 때, 바벨론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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