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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We)-4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은 나에 국한되지 않은 우주적인 공교회 차원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주기도문 이라는 위대한 기도로 한 걸음을 떼며 분명히 주지한 것은, 주기도문이 개인적 차원의 기도가 아닌, 우주적인 공교회 차원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를 알고, “우리” 가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본질적 기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를 이루어, “우리 안의 나”를 발견하는 구원의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분명한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면서 완전한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 코이노니아가 여기에서 풀어집니다. 코이노니아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성도가 되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로서 기억해야 할 마지막 한가지는 우리의 기도, 곧 합심기도입니다. 종종 기도라는 신앙 활동이 개인적 차원안에 국한될 때를 보게 됩니다. 앞선 6절의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기도를 혼자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기도했던 유대인들에게 골방에서 기도하라 하신 말씀은 미신적 기도나 종교적 기도가 아닌 유일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신앙은, 우리로서 어떻게 승리했는가에 따른 상급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이며, “우리의 기도” 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을 움직이는 거대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국가적, 역사적 차원의 중보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 를 범하지 않겠다고 사무엘이 말한 것은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국가 차원의 중보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의 고백입니다. 그와 같이 시대적, 국가적 차원으로 세워진 중보자들은 이러한 영적 권위가 입혀지기까지 연단과 훈련을 받으며, 십자가를 통과하게 됩니다. 가끔 “임파테이션” 이라는 말로, 삶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능력을 받으려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윤리도 질서도 없이 주님의 나라의 능력을 얻으려는 것은 도둑 심보일 뿐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행하는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 했던 시몬은 그 안에 악독이 가득하다는 책망만을 받아야 했습니다.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은 샤먼이나 도둑 심보로 천국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신령함이 풀어지기 위한 하늘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말씀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진정한 임파테이션은 코이노니아 안에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취향을 따라 택하는 것이 아닌, 부르심인 것입니다. 계시적인 몸에서는 계시적인 영성이, 예언적인 몸에서는 예언적인 영성이 흘러가게 됩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응하여 몸의 일원을 이루며, 코이노니아 안에서 영적 삼투압을 통해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시는 요한복음 15장의 열매는 “나”로 맺는 것이 아닌, 일체가 된 나무가 맺는 열매인 것입니다. 한 민족과, 한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드린 제사장적 종들을 통해 일어나는 거국적 영적 변화가 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강력하게 증거하는 교회의 연합의 기도, 합심기도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의 기도는 이 땅에서 하늘을 열고 닫는 다윗의 열쇠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6장의 천국 열쇠는 이사야서 22장과 요한계시록 3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열쇠를 말합니다. 열면 닫을 자 없는 하늘의 열쇠, 다윗의 열쇠가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회에게 주어진 하늘의 열쇠가 돌아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영국의 처칠이,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에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를 앞두고, 전 국민에게 이 합심의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교회가 한 뜻으로 기도할 때, 독일의 침략을 막아서는 기상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났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작은 나라를 위해 UN은 각 국의 젊은이들과 물자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의 기도, 곧 합심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며 역사를 바꿉니다. 에베소서 1장의 말씀같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가 하나될 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열매가 없다면, “우리” 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우리 안에서, 우리로서 기도하여, 성령이 우리로 하나되어 소통하게 함을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로 기도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영광을 나누는 코이노니아,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이유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우리” 의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고 혼자 남은 요한은 복음이 화석화되기 시작할 때, 기독교가 진정한 생명임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직전, 아버지께 고백하는 직접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말씀하시며, 우리로 창세 전에 주께서 아버지와 영화를 누리셨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로 이어지는 11절, 24절의 기도는 과연 아버지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로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위해 하루를 천 년 같고 천 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당신의 영광의 코이노니아를 누릴 우리가 있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누셨던 영광의 코이노니아를 함께 나누고 누릴 자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꿈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코이노니아 안에서, 코이노이아로 우리가 함께 하는 것. 오늘, 이 영원한 가치가 온전히 회복되길 축원합니다. 잠시 사는 이 땅의 삶에 매여, 영원한 상급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수직적 코이노니아에서 출발하여 수평적 코이노니아를 누리며, 이제 대사회적 코이노니아 안에 거하는 새로운 은혜가 부어지길 구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아버지 안에서 우리로 승리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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